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떤 삶을 살아야 후회 없는 인생일까? 라는 의문은 중학교 무렵 철들면서부터 하게 된 해묵은 과제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교회 생활을 하게 되면서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한 단계 더 깊어진 상태로 이 문제가 다가오고, 또 그 해답도 새롭게 제 안에 새겨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한 분 사람으로서 걸어가신 그 길을 우리도 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아들(제2격)로서 그분의 경배받는 지위와 그분의 구속주의 위치는 우리에게 조금의 분깃도 없습니다.
아침에 아침 부흥 책자가 제공하는 몇 구절의 성경 본문들을 대하면서 어린양이신 주님에 대해 좀 더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동물 중에서 ‘양’(sheep)이 우리에게 주는 어떤 인상이 있습니다. 더구나 어린양 (lamb)은 더욱 그러합니다. 오 주 예수님! 당신은 참으로 어린양이십니다. 전에도 그러하셨고(계13:8, 요1:29), 지금도 그러하시며(계5:6), 영원토록 당신은 어린양이실 것입니다(계21:9).
오늘 아침에 어린양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고, 어린양께서 서 계시며, 또한 어린양께서 앞서서 믿는 우리들 을 이끄시는 것을 언급하는 아래 말씀들을 추구할 때, 너무나 풍성하고 누림이 가득했습니다.
1.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들에 대한 하나의 희생 제물을 드리심으로써, 영원히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히10:12).
물론 위 본문에는 어린양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침례 요한이 주 예수님을 가리켜 “보십시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요1:29)라고 했던 말씀과 함께 볼 때, 죄들에 대한 하나의 희생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신 분은 어린양이신 주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합니다(엡1:20, 히12:2).
참고로 여기서 ‘앉으셨다’는 것은 죄들을 제거하는 일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표시요 증명입니다. 그분은 한 번 만에 영원히 그 일을 이루셨기에, 죄를 처리하기 위해 더 이상 어떤 것도 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언제까지 앉아 계시는가? 죄들에 관해서는 위 본문대로 ‘영원히’ 앉아 계시나, 원수들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분의 발 받침대 될 때까지 앉아 계십니다(히1:13).
2. “또 내가 보니 … 갓 죽음을 당하신 것 같은 한 어린양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 어린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셨는데, 이것(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어지신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계5:6).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구속의 방면에서는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지만(히1:3, 10:12),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하시는 방면에서는 승천 안에서 여전히 서 계십니다. 참고로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스데반이 공회 앞에 붙잡혀 와서 길게 증언한 내용을 기록한 사도행전 7장은 그 때 어린양께서 서 계셨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눈여겨 하늘을 쳐다보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가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라고 하니, 그들이 …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다”(55-58절).
오, 승천하신 예수님은 한 면으로는 안식하시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그분의 우주적인 통치로 인해 여전히 바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신 그분의 일곱 눈을 이 땅에 그분의 몸을 건축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마16:18, 계1:4, 4:5, 5:6, 3:1).
오, 이러한 영의 세계의 일들은 인간의 논리로는 다 설명이 안 되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영적 실재들을 보고 또 체험할 수 있도록 ‘마음의 눈’과 ‘지혜와 계시의 영’이 얼마나 필요한지요(엡1:17-18)!
3. “그들은 어린양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그분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며,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 열매로 드려지도록 사람들 가운데서 사 온 이들입니다”(계14:4).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따를 수 있을런지요.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베드로와 그 동생 안드레를 향해 “나를 따라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람을 얻는 어부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마4:19-20). 다음 구절은 야고보와 요한도 “배와 아버지”를 떠나, 주님을 따라갔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지상 사역 때 그분을 따르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 그러나 이미 승천하신 이후에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당신을 이 땅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따를 수 있을지요? 이에 대한 해답은 위 계시록 5장 6절에 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보내진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따르는 길은,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다만 내주하시는 “그 영을 따라 행하는 것”(Walk by the Spirit)입니다(갈5:16, 25). 그렇습니다. 그분은 어느 액자 그림처럼 지팡이를 든 목자로서 어린양들 앞에서 이끄는 방식으로 더 이상 계시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묵상할 때, 문득 사도 바울의 사례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물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이방 땅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들을 세웠습니다(행13:2). 그러나 내적으로 그는 “자기에게 주실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다”라고 말합니다(빌3:14). 물론 여기서 언급된 ‘상’이나 ‘푯대’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세계 안에서의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전후 문맥을 볼 때, 그것은 바울의 내적인 존재 안에서 그리스도 아닌 것들을 비워내고 모든 기회를 붙잡아 그리스도 자신을 얻는 그런 경주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위해 바울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 필요했습니다(빌3:10).
어린양이신 주님도 한 사람으로서 그 길을 가셨고(히6:20, 12:2), 이제 우리도 이 길을 가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십시오.” (마16:24).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습니다”(마10:38).
오, 주님, 돌이켜 보면 안의 영의 인도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주님의 긍휼로 인하여 자아를 죽음 안에 넘기게 하시고,
어린양이신 당신이 이끄시는 그 길 안에 머물고,
또 거기서 남은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