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제가 제일 좋아하던 국어 과목만은 시험 날이 늘 기다려졌습니다. 교과서 내용은 물론이고 수업을 집중해서 듣다 보니 선생님의 설명 전체가 제 기억에 녹음기처럼 입력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출제되든 다 맞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시험 때는 늘 예상 못한 한 두 문제가 나와 애를 먹였습니다. 나중에 졸업식 날 국어 선생님은 본인이 보시던 <국어 완전정복>이라는 참고서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집에 와서 훑어보니, 제가 틀렸던 문제들 전부가 그 책의 심화 학습 문제들이었습니다.
세상 학문을 아는 것에도 이처럼 한계가 있는데, 성경 진리를 익히는 것은 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진리를 추구할 때는 최소한, 1) 성경 근거, 2) 무슨 뜻인지를 이해함, 3) 실제 체험의 과정을 거쳐야 그 진리를 ‘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누린 아래 말씀 중에서 ‘생명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나무’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의 추구가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땅에 보기 즐겁고 먹기 좋은 온갖 나무를 자라게 하셨고,
동산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나무도 자라게 하셨다(창 2:9).
사실은 위 말씀을 처음 읽은 후부터 지난 2주 동안 계속 이 주제를 묵상하고 추구했습니다. 관련 본문들과 각주들을 모두 찾아 읽고, 심지어 관련 설교들과 학술 논문도 구해 읽어 보았습니다. 아래 내용은 이러한 추구를 바탕으로 주님 앞에서 기도하는 중에 얻은 결과입니다.
성경 근거: 소위 선악과는 많이들 익숙한데, 생명나무는 좀 낯설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목회자는 생명나무는 창세기에만 언급되었다가 지금은 사라졌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창세기에 세 번(2:9, 3:22, 24) 잠언서에 네 번(3:18, 11:30, 13:12, 15:4) 나오고, 신약인 요한계시록에도 네 번(2:7, 22:2, 14, 19)이나 나옵니다. 그러나 선과 악의 지식나무는 창세기에만 두 번 나옵니다(2:9, 17).
두 나무에 대한 정의: 먼저 창세기의 생명나무는 실존했던 에덴동산에 “먹기 좋은 온갖 나무”와 함께 언급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시록에서 영적인 실재로 언급된 생명나무의 상징입니다. 어거스틴은 “지성소로서 생명나무는 분명히 그리스도 자신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맞다면, 계시록 2장에서 이기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낙원(새 예루살렘)에 있는 생명나무”(계 2:7)와 22장에서 언급된 ‘생명나무’(2절)는 사실 같은 나무로서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한편 ‘선과 악의 지식나무’는 영적인 죽음을 가져오는, 그리스도 외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관련하여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각종 떡으로 소개하시며 ‘나를 먹으라’고 하십니다(he who eats Me)(요 6:57). 어떤 분들에게는 주 예수님을 먹는 사상이 생소할지 모르나 이처럼 성경 근거를 가진 것입니다. 참고로 서울에서 연예인들이 많이 다니는 곳으로 알려진 교회를 담임했던 모 목회자도 창세기 강해 9에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생명나무를 매일매일 잡수십시오. 음식이라는 것은 한꺼번에 먹는 것이 아니고 매일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축복의 양식입니다”(1998년 설교).
두 나무에 대한 체험: 돌이켜보면 저는 청년 시절에 선과 정의를 추구했습니다. 그 결과 사회 제도적인 불평등을 바꾸는 일에 저의 남은 삶을 초개같이 던져 힘을 보태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반에 주 예수님이 구주이자 생명이심을 알고, 그 이름을 불러 영접했습니다. 물론 주일 학교 때부터 그 이전까지 줄곧 예배당에 다녔으니 지식으로는 어느 정도 하나님과 성경을 알았습니다.
그 후 지금도 잊지 못하는 한 체험을 했습니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문득 ‘선함’(good)은 ‘생명’(Life)과는 다른 것이라는 강한 빛이 임했습니다. 모든 문화 영역, 즉 인간의 노력과 수련을 통해 나온 모든 결과물은 생명과는 전혀 다른 두 근원, 두 영역임이 분명하게 분별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을 나눈 것과 유사합니다(빌 3:8). 또 얼마 후에 성경 지식이 주님 자신은 아니라는 빛이 추가되었고(요 5:39-40), 어느 날 하나님과 구약을 가져 정통을 자처하는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그토록 괴롭히고 반대할까를 묵상하다가, 종교와 주님 자신은 같지 않다는 빛이 임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체험을 통해 인간적인 선함과 윤리 도덕, 성경 지식, 종교는 영적인 죽음을 가져오는 지식나무에 속함을 봄으로써 제 안에 현격한 가치관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영적인 사망의 특징인 메마름과 주님과의 간격이 가끔씩 느껴지던 중, 한 신실한 성경 교사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읽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이 단계가 제게는 아직은 체험하지 못한 일종의 ‘심화학습 영역’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실지적으로 하나님을 누리는 길을 가려면 관념이 철저히 전환되어야 한다. … 사십 세에 이르렀을 때에야 … 하나님을 누리는 이 길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들인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이 헛되이 소모된 것에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그 많은 기도와 성경 공부, 그리고 그때 읽었던 영적인 서적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 나 자신이 그런 잘못된 길을 가서 큰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이 나와 똑같은 전철을 밟는 것을 원하지 않고 … 우리는 반드시 관념에서 철저한 전환을 가져야 한다”(WL, 생명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나무의 이상, 91-92쪽).
결핵으로 2년여를 생사를 오가면서 얻은 빛에 따른 이러한 진솔한 고백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과 “그 길”이 “비좁아 찾는 사람이 적다”는 말씀이 생각나게 합니다(마 7:14). 더 파쇄되어 생명나무만을 먹는 단계에 이르고, 제 안의 모든 불순물이 제해져 주님 자신만 수정처럼 표현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오 주님, 생명나무의 원칙을 따라 남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매 순간 당신을 앙망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