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고등 공민학교로 운영되다가 문교부 인가 후 정식 중학교가 된 곳을 제2회로 졸업했습니다. 한 학년이 두 학급뿐인 산속에 있는 작은 시골 중학교였습니다. 산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곳을 운동장으로 만들려다 보니, 체육 시간과 실과 시간 등 덜 중요한 수업은 모두 작업 시간으로 돌려졌습니다. 우리는 삽과 지렛대로 박힌 돌들을 캐내어 운동장 가장자리로 굴려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의 학교생활은 수업 반 작업 반으로 기억될 정도입니다. 그 와중에 시험이 끝나면 전교생이 인근 군인 극장에 줄지어 걸어가서 영화를 보던 것과 연례행사였던 약 8km 구간의 전교생 달리기 대회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아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오래전 위 달리기 시합 때 경험했던 순간들이 문득문득 소환되곤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많은 구름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모든 무거운 짐과 우리를 쉽게 얽어매는 죄를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합시다(히 12:1).
아침에 위 본문을 여러 번 읽고 묵상할 때, 이 말씀에 대한 저의 과거의 이해가 너무 피상적이었다는 깊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신앙생활도 달리기 경주하듯 해야 한다는 정도의 이해로는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라는 반문에 답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위 구절은 구약과 신약 백성의 차이, 그리고 그 둘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경륜을 바로 이해해야 풀립니다. 그 근거는 첫 단어인 ‘그러므로’입니다. 즉 1)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은 비록 좋은 증거를 지녔지만, 약속된 것은 얻지 못했고,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으며, 3)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전한 것에 이르지 못하니(히 11:39-40), 4) 그러므로 우리가 인내로 경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아침 묵상과 추구가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저는 참으로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남은 일생을 그렇게 경주하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주님께 나아가 그분을 앙망하며 경주에 대한 바른 이해를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또한 관련 자료들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1) 길, 2) 달리는 것, 3) 보상 세 단어가 제 마음 안에 남았습니다.
길: 경주는 결국 길 위를 빨리 달리는 문제입니다. 참고로 제가 위 학교 행사 때 달렸던 길은 군사 목적으로 닦아 놓은 널찍한 신작로였습니다. 반환점도 마침 저희 동네 담배 가게 앞 버스 정류장 표지판이라 제가 어떤 길을 어디까지 달려야 할지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앞에 놓인 경주를 하는 그 길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찾아본 여러 자료 중에서, 아래 내용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경주는 온전하게 되는 것이나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주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경주는 생명의 법이 내적으로 일하는 것도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경주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 주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라고 말씀하셨다. 경주는 하나의 길이요, 하나의 과정이다. 그리스도는 길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또한 경주이시다. 우리의 경주는 그리스도이다”(히브리서 LS #50, 589-590쪽).
또한 묵상 과정에서 떠오른,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이 “잘 달려가다”가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면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다”(갈 5:7, 4)라는 말씀도 이해를 도왔습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길로 삼아 경주해야 합니다. 즉,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 영 안에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그분을 은혜로 누리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주목하는 것은 우리를 이 길 위에 계속 머물러 있게 할 것입니다.
달리는 것: 사도 바울은 “주실 상을 위해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라고 말했습니다(빌 3:14). 여기서 달린다는 말은 문맥에 의하면 그리스도 이외의 것들은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는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보상: 부지런히 달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사실은 위 달리는 과정에서 우리가 얻고 더 풍성히 얻은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주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하고(히 3:11),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를 최고도로 누리게 하며(마 25:21, 23), 공동 왕으로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계 20:6). 또한 최종적으로는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의 실재를 미리 맛보게 할 것입니다(계 3:12).
이 새 예루살렘이 바로 구약의 선진들에게 “약속된 것”, 우리를 위해 예비된 “더 좋은 것”, 우리의 경주를 통해 이뤄질 “완전한 것”입니다(히 11:10, 계 21:12). 이러한 빛 비춤은 저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아멘.
오 주 예수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는 마지막 주자임을 보게 하시고,
사도 바울처럼 인내로서 이 경주를 잘 마치게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