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한 재일교포 사업가가 자신을 소개하는 유튜브를 잠깐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고1 때 단신으로 미국에 왔고, 비장한 각오로 죽도록 공부해서 단 2주 만에 고등학교 전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는 그 후 버클리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19세 때 세웠던 향후 50년의 인생 계획대로 많은 돈을 벌어 2014년 기준으로 일본 최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인상적인 한 가지는 이 분은 자신의 삶이 어떤 식으로든 인류에 공헌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르면 아무리 치열하게 살았어도 하나님의 눈에 그 인생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보배이신 ‘하나님을 담는 그릇’(고후 4:7)으로 피조된 자신의 창조 목적을 놓쳤기 때문입니다(계 4:11, 롬 9:22-24상). 아쉽게도 이 분은 사업에는 크게 성공했지만 아직 하나님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읽고 묵상한 아래 말씀에 따르면, 거듭난 후에 우리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존재로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 그분의 긍휼이 얼마나 필요한지요!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쓸모없게 된 것이며,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갈 5:4).
여러 번역과 그 의미
신약 성경 회복역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쓸모없게 되다”로 번역한 ‘카타르게오’(2673)를 개역 성경은 그냥 “끊어지고”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역본들은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흠정역), “무용하게 되고”(한킹), “너희는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모든 유익을 빼앗기게 되고”(다아비 역)라고 각각 번역했습니다. 참고로 헨리 알포드는 이 단어를 ”Ye were annihilate from Christ”, “were cut off from Christ and thus made void”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회복역은 이 모든 방면을 고려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상태’를 포함하되, 그 결과 그분의 경륜 앞에서 ‘쓸모없게 된’ 점에 방점을 두어 번역했습니다.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위 ‘카타르게오’를 아래와 같이 ‘접붙여진 두 나무’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열등한 나무가 우수한 나무에 접붙여지면, 열등한 나무는 그 우수한 나무의 부분이 됨으로 인해 모든 유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접붙여진 가지가 나중에 우수한 나무로부터 떨어진다고 가정해 보라. 이런 경우, 열등한 나무는 … 그 나무에 접붙여짐으로 얻은 모든 유익을 잃게 되는 것이다. … 이것이 바울이 5장 4절에서 뜻한 것을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으로 침례 받음으로 우리는 부유한 나무인 그분 안으로 접붙여졌다. … 그러나 만약 내가 그리스도를 버림으로써 그분을 우리의 실제적인 체험 안에서 떠나게 한다면 우리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그리스도에게서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갈라디아인들은 율법과 할례에 떨어졌다(갈라디아서 LS, #25, p.247).
사도 바울의 중심 사상
적지 않은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혹은 ‘쓸모없게 된다’는 표현 자체가 다소 낯설 수있습니다. 또는 이것을 알미니안주의 식으로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후 문맥 그 어디에서도 그런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에 이 말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생명과 인격으로 삼는 삶(갈 2:20)을 살아야 함에도, 그리스도가 아닌 ‘옛 나’를 사는 상태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만일 어떻게 살든지 죽으면 천국 갈텐 데 뭐가 그리 복잡하냐고 말한다면,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핵심 요점을 통째로 놓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믿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서와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구속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들의 자격’(휘오데시아, 개역 성경은 ‘아들의 명분’), 즉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갈 4:4-5). 또한, 자신은 이것을 위해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합니다(19절). 바울은 이 ‘휘오데시아’를 “새 창조물”(갈 6:15) 혹은 “하나님의 이스라엘”(16절)로도 표현하면서, 이것은 오직 은혜 안에서 머물며 넘치는 그 영의 공급을 믿음으로 받아드려 영적 생명이 자랄 때 가능하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어떤 것이 ‘쓸모 있다’ 혹은 ‘없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휘오데시아)로 만드는 데 유용한지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갈라디아 믿는 이들이 ‘할례’를 실행한 것은 전혀 무익하며, 사도 바울이 볼 때는 참으로 어리석고 속상한 일이었습니다(갈 3:1, 5:6, 6:15).
현재 상황에 적용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마음에 와닿았던 또 한가지는 이 구절에 쓰인 동사들의 시제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쓸모없게 되다’(카타르게오, 2673)와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다(에크피토, 1601 b)는 헬라어 시제가 Aroist인데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이 현재완료로 번역했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디카이오오, 1344)은 현재 혹은 현재 진행형으로 번역했습니다.
체험적으로 볼 때, 우리가 현재 주님과 달콤한 교제 안에 머물고, 지금 그분을 은혜로 누리고 있으면, 그 외에 다른 것으로 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믿는 이들처럼 일단 은혜에서 떨어지고 그리스도와도 간격이 생기면, 그 후에는 그리스도 자신을 대치하는 이런저런 실행들이 조금씩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 생활은 우리가 누린 그리스도가 존재와 삶을 통해 흘러나가는 것이지, 주님과 분리된 우리가 주체가 되어 그분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겉보기에는 비슷해도, 그 근원이 누구인가를 따져보면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은혜를 누림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증가(the increase of God)(골 2:19, 엡 1:23)하시는 것만이 사도 바울이 말한 ‘단체적인 휘오데시아’의 출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엡 4:16, 1:5).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불신자는 물론이고 적지 않은 믿는 이들조차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쓸모없는 시간을 살고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자신의 상태를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시간을 아끼십시오. 왜냐하면,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엡 5:16-17).
오 주 예수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쓸모없게 된 모든 이들 깨워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알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