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제 별명은 ‘글쎄요.’였습니다. 뭔가 확신이 안 서는 상황에서 가부 간의 답변을 요구받으면 이처럼 본능적으로 잠시 유보하는 자세를 취하곤 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주변 친구들의 눈에는 신중하거나 혹은 답답해 보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어떤 의사표시에는 그에 걸맞은 책임이 따른다는 생각, ‘나는 바른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자의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때나 지금이나 한번 사는 인생, 후회 없는 최고의 인생을 살려는 갈망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바뀐 것이 있다면, 전에는 스스로 노력해서 그렇게 되려고 했다면, 지금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살아낸 결과로 그리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아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심’의 한 모습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이 증언하는 우리의 자랑거리가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단일성과 순수성으로 처신하였고
육체에 속한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
여러분을 대할 때는 더욱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고후 1:12).
위 본문을 처음 읽었을 때는 ‘자랑거리’라는 단어가, 조금 더 읽었을 때는 ‘양심의 증언’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추구하자, 바울의 강조점이 ‘하나님의 단일성과 순수성’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 처신했다는 말에 있음이 제 안에 만져졌습니다.
사실 어느 때부터인가 제 안에는 성경을 정확히 알고 또 많이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의 간증이 있어야 한다는 무거운 부담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위 구절은 바울이 본 계시가 아니라, 바울이 세상 사람들과 특별히 고린도 교회 앞에서 어떻게 처신했는지(have conducted)를 양심을 걸고 증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렇게 살았으면 우리도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에 이르자 제 안에서 저절로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오 주님, 저로 이 세상에서 또 교회 안에서 당신의 단일성과 순수성으로 처신하게 하소서, 오 주 예수님, 저로 육체에 속한 지혜가 아니라 매사에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하소서!’ ‘주님, 하나님의 단일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요? 오 주님, 하나님의 은혜로 처신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그 후 추구를 통해, 다비역 등 대부분의 원문 직역 성경들은 (하나님의) 단일성(572)을 ‘simplicity’(개역은 ‘거룩’)로, 국제표준역(ISV)은 ‘pure motives’로 번역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 본문 앞의 문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소아시아에서 직면했던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여러 곤란한 상황에서,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오로지 의지했습니다(7-10절). 그런데 사실 그가 그러한 고난의 환경에서 체험하고 누렸던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의 은혜이셨습니다(고전 15:10).
그동안 교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여러 상황들이 저를 전보다는 더 단순하게 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즉 그리스도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내려놓아지고,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확신은 전보다 더 증가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위에서 누렸던 하나님의 단순성에 비춰볼 때, 저라는 존재가 여전히
너무 복잡하고 주님께 터 잡지 않은 아이디어와 궁리가 많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묵상 과정에서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이 떠올랐고(벧전 5:5), 한 신실한 성경교사의 겸손에 대한 아랫글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겸손해지라고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겸손해지라고 가르치는 것은 가면을 쓰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바울의 가르침은 참되다. 그의 가르침은 우리의 가면을 깨뜨린다. 우리는 성격에 관한 우리의 가르침에서, 진실하고 정확하고 엄격할 필요가 있다고 교통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한 사람만 가능하다. 인류 역사에서 나사렛 사람 예수님만이 진실하고 정확하고 엄격하신 유일한 분이셨다. 그분은 연기하지 않으셨고 자연스럽고 진실한 방식으로 사셨다. 활력 그룹의 구성원들인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CWWL, 1994-1997, Vol 5, p. 145).
주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람으로서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삶을 사셨고, 사도 바울도 그런 삶을 똑같이 다시 살았습니다. 오, 이제 이런 본을 따라서 몸의 한 지체인 저도 그런 지상 최고의 삶을 살기를 얼마나 갈망하는지요!
오 주님, 제게 삶은 그리스도 당신이십니다.
속히 우리 모두를 당신의 복사판으로 만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