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94회 - 죽고 사는 문제 입니다
에세이
청지기 , 2022-08-08 , 조회수 (369) , 추천 (0) , 스크랩 (0)


자그마한 뒤뜰이 있는 주거공간을 갖게 되어 작년에 생전 처음으로 유실수 묘목 하나를 사다 심었습니다. 제 귀에는 ‘낑깡 나무’가 더 익숙한 금귤(金橘) 나무였습니다. 매일 물도 주고 나름대로 정성을 들였는데 왠지 모르게 잔가지부터 말라 죽더니 나중에는 진드기까지 생겼습니다. 죽은 잔가지들을 전지가위로 싹둑싹둑 자르다 보니 원래 작았던 묘목이 나중에는 거의 본 둥치만 남았습니다. 속으로 이 나무는 죽었다 싶어 그 후로는 한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해가 바뀌고 어느 날 우연히 뒤뜰에 가 보니 얼마 안 남았던 마른 가지에 새잎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몇 알은 안 되지만 노란 금귤 열매도 달렸습니다. 아침에 죽는 것은 무엇이고 사는 것은 무엇인지를 묵상하는 중에, 문득 뒤뜰의 금귤 나무가 생각났습니다.

 

여러분이 육체를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그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 8:13).

 

아침에 영어와 한국어로 위 말씀을 반복해서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아직은 육신도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you must die”(너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말씀이 잘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산다는 말씀도 매한가지였습니다. 위 구절이 육신이 죽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망과 영적인 삶을 말하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위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본문인지요? 오 주님,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여 주옵소서! 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죽이나?

 

본문대로라면, ‘육체를 따라 사는 것’(live according to the flesh) 혹은 ‘몸의 행실’(the practices of the body)을 죽이는 것입니다. 아래 관련 각주는 이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여야 하는 것은 몸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몸의 행실이다. 몸은 구속받아야 하지만(롬 8:23) 몸의 행실은 죽어야 한다. 이러한 행실은 죄와 관계된 일들뿐만 아니라그 영을 떠나 우리의 몸으로 행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RcV 롬 8:13 각주 2).

위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유사한 내용을 말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여러분의 육체의 각 부분을 죽음에 넘기십시오”(골 3:5),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 5:24).

 

이러한 말씀들을 바로 이해하려면 성경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해 조금 더 섬세한 이해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즉 옛사람(혹은 ‘’)은 우리의 <존재>를 말하고, 위 본문이 말하는 육체는 실지적인 생활에서 우리 <존재의 표현>을 가리킵니다. 또한 옛사람과 ‘나’가 십자가에서 못 박힌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성취하신 <사실>(fact)이지만(롬 6:6, 갈 2:20), 그 육체를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우리가 그 사실을 실지적으로 <체험>(experience)하는 것입니다(갈 5:24, 마 16:24).

 

이렇듯 이미 성취된 사실과 이것을 매일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것 사이에는 우리의 믿음(혹은 믿음의 행위(your work of faith) 살전 1:3)이 연결고리가 되어야 합니다. 워치만 니는 이것을 높은 담 위로 맨 앞에 ‘사실’이 걸어가고 그 뒤를 믿음과 체험이 따라가는데, 만일 중간의 믿음이 체험을 바라보려고 몸을 돌이키는 순간 담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는 말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나를 따라오십시오”(눅 9:23)라는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체험된 말씀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그냥 교리적 가르침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둘의 차이는 믿음의 적용이 그에게 있는지 여부일 것입니다.

 

 

어떻게 죽이나?

 

소위 말하는 위 ‘자기 부인’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래 관련 각주는 균형 잡힌 성경 진리에 기초한 해답을 제공합니다.

 

우리의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지만, 반드시 그 영으로써 해야 한다. 한 면으로는 우리가 먼저 주도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그 영은 우리를 위하여 그 일을 하지 않으신다. 다른 한 면으로 우리는 성령의 능력도 없이 우리 자신이 노력하여 몸을 처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 영과 우리가 동역하는 것이다. … 우리가 먼저 주도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때에 그 영께서 오셔서 그러한 행실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능을 적용하여 몸의 행실을 죽인다(롬 8:13, 각주 3).

 

아래 내용은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 영 안에 안식이 없다면 그 생각을 중지하라. 당신의 영을 불안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생각을 돌이키라. 당신이 따져볼 때 영에서 공허를 느낀다면 언제든지 중지하고 생각을 영으로 돌이키라. 당신은 ‘오 주 예수여, 나를 구출하소서. 주여 나에게 사망을 주는 생각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키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즉시 안식과 위로와 만족을 얻고 영 안의 힘까지 얻을 것이다. …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영을 향할 때 우리의 육신은 죽게 될 것이다. … 이것은 한번 일어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매일의 실행이다. ... 이것이 영을 좇아 행하는 길이다(롬 8:4)(로마서 LS, #16, 223-225쪽).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언변과 모든 지식에서 풍족하고…은사에도 부족하지 않았고”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던 고린도 교회(고전 1:5-7)가 왜 바울에게 “육체적인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기들“(infants)(3:1) 소리를 들었는지가 더 이해되었습니다. ‘오 주님,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지만 그에 걸맞은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 우리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로 세월만 가게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영적인 애늙은이가 되지 않게 구원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제 깊은 곳에 있습니다.

 

 

 

오 주 예수님, 자기를 사는 시간은 죽어 있는 시간임을 보게 하옵소서!

언변과 성경 지식과 은사에서 돌이켜 당신 자신만을 관심하고,

하나님 앞에도 살아있는 존재로 발견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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