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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1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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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영-생명과 영
서론
주님께선 자신의 사역의 목적이 크리스찬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데 있음을 선언하고 계신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그렇다면, 생명이야 말로 기독교복음의 핵심이 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크리스찬들은 생명에 대해 다분히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을 뿐 구체적이고 확실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동안 생명에 대한 신학적 연구는 지극히 부족하였고 그나마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접근에 그쳐 그동안 교회가 성도들에게 보다 심도있고 체계적인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무지나 무관심보다는 역사를 주관하시며 주권적으로 인간의 연대를 정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속에서 그 이유를 쁹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가시적 재림이 매우 임박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바로 지금이야 말로 이 생명에 대한 연구가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활성화 되야 할 때가 아닐까? 본고는 이같은 취지로 생명을 순수하게 성경을 근거로 보다 체계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아울러 생명의 주체인 주님의 영을 다룸에 있어 필자는 두려운 마음으로 그러나 당당하게 현재로서는 이단으로 정죄당할 수 밖에 없는 이론을 성경과 신학으로 철저하게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세상에 선 보인다. 격심한 반발과 비난의 성토가 예상되는 가운데 필자는 나름의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이같은 시도에 도전한다, 아울러 필자는 이 번 기회를 통해 본 이론이 기독교계 내의 여러 채널을 통해 충분한 신학적 검토가 이루어 지길 바라며, 또한 비난을 위한 비난이 아닌 창조적인 비평이 뒤따라 주기를 바란다. 아울러 필자는 이 지면을 빌어 언제 어디서든 진리를 위해 변론할 자세가 되어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I. 영의 실체
1. 어휘
히브리어'루하,' 헬라어 '프뉴마'는 영이라는 의미외에 호흡(기운), 바람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영이 호흡의 의미로 쓰인 예는 구약에서는 창6:17; 삼하22:16; 욥4:9; 시18:15; 전3:19; 사30:28; 렘10:14; 겔37:5-6;합2:19 등이며, 신약에서는 단 두곳인데-살후2:8과 계11:11- 흥미로운 점은 오직 King James Version만 유일하게 영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이 바람의 의미로 쓰인 예는 구약에서는 창8:1; 출15:10; 민11:31; 삼하22:11; 욥41:16; 시83:13; 사57:13; 슥5:9 등이며, 신약에서는 오직 한곳, 요3:8에서만 볼 수 있다.
2. 영은 하나님의 essence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essence에 대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요4:24). 여기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분 인격을 모두 가리키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essence가 영이라는 사실은 성부, 성자, 성령의 essence가 모두 동일한 영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각 인격은 동일한 essence인 영과 다른 인격과 구분되는 자신의 고유의 성격을 지닌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동일한 하나의 essence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ontologically 서로 다른 인격이 된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한 essence인 영을 지니고 있는 서로 다른 인격인 셈이다.
3. 영은 essence의 의미로, 성령은 hypostasis의 의미로 엄밀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기존 신학은 영과 성령을 동일시 해 왔다. 그러나 영을 성령과 동일시 할 경우, 고후3:17의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라는 구절은 삼위일체론과 상충하게 된다. 다시 말해, 여기서 주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와 성령의 두 인격이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부 신학자는 요16:14의 내용을 근거로 들어, 본절은 인격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의 동일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다시 말해, 성령의 사역은 그의 성부와 성자와의 연합에 근거한 것이므로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그같은 성령의 사역의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Here the Lord(Christ) is identified with the Spirit, not with respect to personality, but as to manner of working...the work of the Spirit is based on His unity with the Father and the Son"(참조: Berkhof, 97).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영을 성령과 동일시 해온 기존 신학의 자체적 모순을 변호하기 위한 빈약한 논리이며, 본절은 분명히 성령과 다른 인격인 그리스도의 영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참조. Berkhof, L. Systematic Theology. Grands Rapids: Eerdmans, 1938.
결과적으로 영은 essence의 의미로, 성령은 hypostasis의 의미로 보는 것이 정확한 시각이다. 다시 말해, 영은 하나이며 이 하나의 영은 성부의 영, 성자의 영, 성령이라는 상이한 세 인격으로 구분될 수 있다. 또한 이 세 인격은 모두 공통적으로 동일한 영을 essence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4. 예수의 영과 성령은 상이한 인격이다.
기존의 신학은 인격과 그 인격의 영을 각기 hypostasis와 essence로 구분하여 이해했다. 이를테면, 예수와 성령은 다른 인격이지만, 예수의 영과 성령은 동일한 essence인 영을 지니고 있는 동일한 인격으로 믿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인격과 그 인격의 영은 ontologically 같은 의미로 보아야한다. 즉, 예수와 예수의 영은 동일한 인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이 각기 다른 인격이듯이 성부의 영, 성자의 영, 성령도 각기 다른 인격으로 보아야 한다.
Incarnation은 예수의 영과 성령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다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예수는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되는데, 이때 성령이 그 mediator역할을 한다(마1:18, 20). 여기서 성령의 잉태가 곧 예수의 영을 의미한다면,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유의 영이 없이 성령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요한의 세례후 성령이 예수에게 강림한 사실(마3:16; 눅3:22), 그리스도가 스스로 자신과 성령을 구분하여 성령에게 divine authority를 부여한 사실(마12:31-32))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성령을 자신의 영으로 지니고 있었다면, 그의 육신의 사역은 곧 성령의 사역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셨는가? 몸만 그리스도요, 영은 성령인 그리스도! 이 얼마나 해괴한 발상인가!
기존의 신학자들이 예수의 영을 성령과 동일하게 취급해온 성경적 근거는 대체로 두 곳이 제공하고 있다. 첫째 근거는 갈4:6이 제공한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들은 여기서 '아들의 영'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은 곧 성령의 내주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고전3:16; 6:19; 딤후1:14. 그러나 성경은 곳곳에서 예수의 영 역시 우리 안에 거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두 번째 근거는 벧전1:11이 제공한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신학자들은 벧후1:21의 내용-"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영은 곧 성령임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시각은 동일한 essence를 갖고 있는 각 hypostasis간의 상호 관계(in and through each other)를 간과하는 것이 된다. 물론 각 인격은 각자에게 해당되는 독특한 사역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각자의 역할은 완전히 배타적인 어느 한 인격만의 고유한 사역이 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창조는 성부 한분의 사역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공동 사역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8:6); "땅이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 그러므로 자신의 Messiah사역과 관련하여,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 그리스도의 영이 예언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은 사실 예수의 영을 예언의 영으로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계19:10). 여기서 예언의 영을 성령으로 해석할 경우, 본절의 예는 그리스도의 영의 예언사역을 입증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될 수 없겠지만, 계시록 전체에서 성령은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고 영만 등장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 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여러 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동일한 문구-"귀있는 자는 영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를 주목할 때, 이 영은 곧 그리스도의 영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계1:1; 2:1, 8, 12, 18; 3:1, 7, 14.
사실 주님은 곳곳에서 자신의 영적 재림에 대해 언급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이 밖에도 성경은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재림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막16:20; 행3:19-20; 11:21; 14:3; 16:14; 18:9; 22:17-18; 갈1:12; 요일5:18-20; 롬8:9-10; 고후13:5; 요일3:24; 히9:28; 고전6:17.
5. 성부의 영과 성령은 ontologically 상이한 인격이지만, economically 동일한 인격으로 보아야 한다.
성령이나 예수의 영과는 달리 성부의 영은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문자적으로 직접 언급되지 않고 있다. 물론 의미상 성부의 영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으나, 그 경우도 실은 성령을 의미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사42:1의 경우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여기서 speaker는 성부이므로 '나의 영'은 곧 성부의 영을 가리키는 데, 이것은 성경의 전반적 내용을 고려할 때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눅3:22; 요3:34; 행10:38. 이외에, 성부의 영을 나타내는 또 다른 예는 롬8:11이 제공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는 곧 성부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바울은 성부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한다고 말하고 있는 데, 그것은 곧 성령의 내주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고전3:16; 6:19; 딤후1:14.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할 때, 성부의 영은 곧 성령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성령의 eternal procession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요컨데, 성부의 영과 성령은 엄연한 두분의 인격으로서 ontologically 다르지만, spiration에 의해 성령이 성부의 영을 대신하는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영'은 곧 '나로부터 나오는 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영, 혹은 하나님의 영 안에 ontologically 성부의 영, 성자의 영, 그리고 성령의 세분 인격이 존재하지만, economically 성자의 영과 성령 두분만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부가 speaker일 경우에 '나의 영' 즉 '나로부터 나오는 영'은 성령 한분이지만, speaker가 하나님일 경우엔 '나의 영'은 essence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창6:3a를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여기서 speaker는 하나님인데 세분의 인격중 어느 한분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므로 '나의 영'은 hypostasis가 아닌 essence, 즉 성자의 영과 성령 모두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사30:1; 44:3; 59:21; 겔36:27; 37:14; 39:29; 욜2:28-29; 학2:5; 슥4:6.
6. 예수의 영과 성령은 상호 독자적이되 배타적이 아닌 방식으로 함께 사역해 가고 있다.
모든 사실을 종합할 때, 예수의 영은 성령과 다름을 알 수 있고, 또한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단지 성령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ontologically 성부의 영, 성자의 영, 성령을, economically 성자의 영과 성령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두분의 인격은 각기 하나의 동일한 essence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독자적이되(고전12:11), 배타적이 아닌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의 사역이 성자의 사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요14:26; 15:26; 16:13-14; 고전12:3; 요일3:24.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영은 성령과의 연합을 통해 성부의 계획을 이루어 간다. 요14:10에서 그리스도는 자신과 성부의 완전한 연합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사역이 성부의 계획에 근거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안에'! 이것은 바로 성부와 성자의 essence가 영임을 시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성자의 영과 성부
의 영이 하나의 동일한 essence인 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요일4:12은 하나님의 내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의 내주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essence로서 성자의 영과 성령 모두를 의미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4:12);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성령은 procession을 통해 성부의 영을 대신하므로 '아버지가 내안에, 내가 아버지안에' 는 곧 '성령이 내안에, 내가 성령안에'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성자의 영은 결국 성령과의 연합을 통해 성부의 계획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요10:38; 14:11, 20; 17:21. 결국, 성자의 영과 성령은 다른 인격으로서 함께 성부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성부의 계획은 또한 성자의 지혜를 통한 것이기도 하기에 성부 한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인 것이다. 요컨데, 성자의 영과 성령은 독자적이되 결코 배타적이 아닌 방법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7. 영은 하나님의 영, 주의 영(여호와의 영)과 동일한 essence의 의미이며, 이것은 경우에 따라 모든 인격을 포함하여 지칭하거나(essentially), 어느 한 인격만을 지칭한다(hypostatically).
히브리어 '루하 콰도쉬' 헬라어 '프뉴마 하기온'으로 나타내는 성령은 구약에서 세곳, 신약에서는 89곳에서, 성자의 영은 '예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신약에서만 5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 외는 모두 영, 하나님의 영('루하 엘로힘,' '프뉴마 세우'), 주의 영('루하 예흐바,' '프뉴마 퀴리우')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hypostatically 예수의 영이나 성령 어느 한 분을 지칭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대체로 essentially 예수의 영과 성령 모두를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참고로 성령이 구약에 언급된 곳은 시51:11; 사63:10, 11이며, 성자의 영이 언급된 곳은 행16:7; 롬8:9; 갈4:6; 빌1:19; 벧전1:11이다. 성령이 신약에 언급된 곳은 다음과 같다.
마 1:18, 20; 3:11; 12:32; 28:19
막 1:8; 3:29; 12:36; 13:11
눅 1:15, 35, 41, 67; 2:25, 26; 3:16, 22; 4:1; 10:21; 11:13; 12:10, 12
요 1:33; 14:26; 20:22
행 1:2, 5, 8, 16; 2:4, 33, 38; 4:8, 25, 31; 5:3, 32; 6:5; 7:51, 55; 8:15, 17, 19; 9:17, 31; 10:38, 44, 45, 47; 11:15, 16, 24; 13:2, 4, 9, 52; 15:8, 28; 16:6; 19:2, 6; 20:23, 28; 21:11; 28:25
롬 5:5; 9:1; 14:17; 15:13, 16
고전 6:19; 12:3
고후 6:6; 13:13
엡 1:13; 4:30
살전 1:5, 6; 4:8
딤후 1:14
딛 3:5
히 2:4; 3:7; 6:4; 9;8; 10:15
벧전 1:12
벧후 1:21
유 1:20
II. 생명에 대한 성경적 고찰
1. 어휘
성경에서는 생명이 그 의미상 육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으로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어 '하이'와 '하야'는 비록 영적생명과 육적생명에 공통적으로 쓰이긴 하지만, 주로 영적생명을 나타내며(신30:6; 시133:3; 잠3:22; 8:35; 10:16; 단12:2; 말2:5), 육적 생명에는 주로 '네페쉬'가 쓰이고 있다(창44:30; 출21:23; 신19:21; 열상20:39, 42; 잠12:10). 헬라어 '죠에'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눅16:25; 행17:25)를 제외하곤 거의 영적 생명의 의미로 쓰이고 있으며(마18:8-9; 막9:43, 45; 요3:36; 5:40; 롬5:17-18, 21딤후1;1; 딛1:2; 요일1:2), 육적 생명의 의미로는 '프쉬케'가 쓰이고 있다(마2:20; 6:25; 막3:4; 눅21:19; 요10:11; 행27:10).
2. 생명과 영생의 관계
영생은 보통 영벌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내세적 구원을 나타내는 의미로 인식되어 왔으나(마18:8-9; 25:46; 막9:43, 45; 10:30; 눅18:30), 그것의 정확한 성경적 의미는 영원한 생명(eternal life), 또는 생명의 영원성(the eternity of life)을 나타내는 것이다(창3:22; 21:33; 단4:34; 12:7; 요4:14; 11:26; 요일2:25; 5:20). 그러므로 영생은 시제(tense)의 개념이 아닌 특성(characteristic)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보다 성경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죠에'에는 이 영원성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것의 죽음, 또는 단절은 있을 수 없다(요11:25-26), 다시 말해, 생명은 영생의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마18:8-9; 막9:43, 45). 바로 이같은 이유로 인해, 성경은 전반적으로 생명과 영생을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다: 마18:8-9; 19:16-17; 막9:43, 45; 요3:36; 5:40; 6:53-54; 롬5:17-18, 21; 요일1:2; 3:14-15; 5:11-13. 참고로, 상대적으로 현세의 개념이 강했던 구약에서는 영생이란 단어는 단 6번 언급되고 있다: 창3:22; 21:33; 시133:3; 단4:34; 12:2; 12:7.
3. 생명의 정의 및 특성
생명은 그리스도가 지니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며(요1:1-4; 5:26), 이것은 때때로 그리스도 자신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요11:25; 골3:4; 요일1:2). 생명은 영원부터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그리스도는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전수받았으며(요5:26), 이것은 에덴의 창조시 생명나무로 구현되었다(창2:9; 3:22).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타락은 결국 생명의 유실을 초래하였고(창2:15-17; 3:17-19, 22-24; 롬5:12),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유실된 생명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롬5:15-18; 6:23), 그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에게 선물로 값없이 주어진다(계21:6; 요3:16; 20:31). 결국 크리스찬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주체는 그리스도이며 생명의 공급은 성경을 통해서(요1:1-4; 6:63; 히4:12)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크리스찬에게 내주함으로써 이루어 진다(롬8:9; 고전15:45; 요일5:12).
크리스찬에게 있어 생명은 일차적으로 내세의 구원을 의미하지만, 보다 현실적인 의미에 있어 그것은 크리스찬이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격을 반영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을 의미한다.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생명의 첫 열매는 믿는 자의 중생으로 나타나며(요3:5-6; 6:63; 엡5:26), 이것은 결국 그사람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내면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갈5:22-23; 고전13:4-7). 이러한 인격적 변화는 곧 빛이 되어 밖으로 들어나게 되어(엡5:8-9),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이 영광을 받게 되며(마19:17; 5:16), 그리스도의 의가 존귀함을 얻으며(갈2:16; 벧전2:24),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위엄을 얻게 되는 이치인 것이다(요17:17; 3:21; 딤후2:15).
크리스찬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분량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의해 각기 다르게 부여되는 데(요10:10; 마15:15) 이것이 교회를 위한 사역에 있어 그 사람의 사역의 성격과 직분을 결정짓는다(엡4:7-12; 롬12:3-8). 또한 이 생명의 분량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의 충만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한다(엡4:7-13). 생명은 일차적으로 조건없이 크리스찬에게 모두 부여되지만(롬5:18; 딤후1:9), 그것을 추가적으로 공급받는 것은 믿음의 행위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믿음의 행위란 크리스찬이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격을 드러내는, 즉 그리스도의 영의 열매를 자신의 삶속에서 나타내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갈5:22-23; 딤전6:18-19; 약1:12: 요일3:14; 계2:7). 크리스찬은 이같은 결실행위를 통해 생명을 추가적으로 공급받게 된다(마25:29; 요15:1-2). 이같은 생명의 추가적 공급은 또 다른 결실 행위로 이어지게 되어 결국 생명의 분량은 이러한 연쇄적, 상승적 원리에 의한 반복을 거쳐 충만한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크리스찬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미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눅17:20-21; 요14:19-20).
생명충만은 곧 그리스도의 영의 충만을 의미한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반면(눅1:13-15; 행9:17), 생명충만은 믿는 자의 결실행위에 준하여 이루어 지는데, 이같은 결실행위는 믿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과의 밀접한 연합을 통해 생명을 충분히 공급받을 때 가능하다(요15:4-5; 고후5:6). 성령의 은사가 주로 외부로 나타나는 능력과 연관이 있는 것과 달리(고전12:8-10; 막16:17-18), 생명의 은사, 즉 그리스도의 영의 은사는 주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반영하는 내면적인 품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갈5:22-23; 엡5:8-9). 따라서, 성령충만의 효과는 일시적인 반면(행2:4; 4:31; 눅1:67), 생명충만의 효과는 지속적이다(눅17:20-21).
마7:13-23은 성령의 은사와 상관없이 오직 생명이 충만한 자에게만 지상천국을 체험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21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는데, 여기서 천국은 내세의 구원을 의미하고 있다기보다는 지상천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시각일 것이다. 믿음외에 별다른 구원의 조건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2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령의 은사를 행사하는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지상천국을 체험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의미는 문맥상 15-2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결실행위를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결실행위는 13-1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본문을 통해 크리스찬은 생명충만함을 입어 하나님의 뜻대로 결실을 함으로써 지상천국을 소유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마16:28).
결론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과 엄연히 다른 인격으로서, 두 분의 인격이 현재 대내외적으로 함께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 두분의 사역은 독자적이긴 하지만, 상대에게 있어 결코 배타적이지 않는 방식으로 철저한 공조가 이루어 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의 대내적인 사역은 두분의 인격이 크리스찬 안에 함께 거함으로써 이루어 진다. 그리스도의 영은 크리스찬 안에 거함으로써 생명을 부여하고, 이로써 중생을 이루어 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반영하는 영의 열매를 맺게 한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선과 의와 진리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성령은 크리스찬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이 자신안에 있음을 의식하게끔 도와주며, 나아가 그의 영을 성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영적연합을 돕는 역할을 수행한다. 두분 인격의 이러한 내주는 크리스찬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라는 삼위개념을 낳게 되어, 삼위일체와는 본질적으로 엄연히 다르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형상의 단서를 제공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의 대외적인 사역은 교회를 비롯해 사회전반에 걸쳐 이루어 진다. 성령은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왕권을 확립시켜 나가며, 그리스도의 영은 자신이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수행했던 3대 직임(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을 계승하여 자신의 구속사역을 완성시켜 나간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비록 그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할 만한 지식은 없을 지라도- 실제로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계시와 환상을 체험해 왔으며, 지금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의 사역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크리스찬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생명사역이다. 이 생명은 크리스찬의 내세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로하여금 현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영의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인격을 반영하는 삶을 살게끔 도와주는 힘의 원천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복음은 후자에 비중을 두고 있으며, 실제로 성경의 많은 부분이 이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내세의 구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신학이나 신앙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것은 인본주의적 사고에 기인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내세의 구원이 크리스찬의 존재의 목적이라면, 또 그 구원을 얻기 위해 지상에서 숱한 고난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는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좋지 않을까? 모름지기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외에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바로 이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크리스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주변에서 각종 매체를 통해 '성령충만'이라는 구호를 접해 왔다. 이제, 새천년을 맞아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안에 계시며, 온 대기에 충만하여 성령과 함께 그 사역을 이루어 가고 계신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마땅히 '생명충만'을 외쳐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은 기독교 이천년사의 오랜 전통과 구습, 불완전한 지식으로 인해 전혀 새롭고 완전한 진리를 받아 들이기를 주저하는 우리를 향해 단호한 어조로 권고하고 계신다: "귀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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