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미국 이민 초기에 겪은 일입니다. 저희가 살던 아파트는 총 12가구로서, 아담한 수영장을 가운데 두고 여섯 가구가 서로 마주 보는 작은 단지였습니다. 아파트가 이층이라 한 층에는 단 세 가구뿐이니, 다 서로서로 낯이 익었습니다. 특히 홀로 된 백인 할머니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곱게 나이 들어서 그런지 품위가 있고 마주치면 늘 환한 미소로 아는 체를 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외출했다가 급히 집에서 가지고 나올 것이 있어서 어떤 분의 차고 앞에 차를 세우고 채 1분도 안 되어 다시 나왔습니다. 그런데 잘 알고 지내던 한 할머니가 왜 남의 차고 앞에 차를 세웠느냐며 불같이 화를 내었습니다. 그때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끝났지만, 평소와 너무 다른 그분의 돌변한 모습에 적잖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일종의 문화 충격과 함께 (옛)사람이 베푸는 친절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다윗이 그(므비보셋)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내가 분명히 그대의 아버지 요나단을 생각해 그대에게 친절을 베풀겠소. 내가 … 사울의 온 땅을 그대에게 돌려줄 것이오.
그리고 그대는 항상 내 상에서 음식을 먹도록 하시오”(삼하 9:7).
사실 위 본문은 제게 매우 익숙합니다. 워치만 니 전집에서 ‘다윗과 므비보셋’이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다뤄진 내용이기 때문입니다(제18권, 44-63쪽). 특히 므비보셋의 ‘저는 다리’에 해당하는 우리 자신을 보지 말고, ‘왕의 상 위에 놓인 음식’인 주님의 풍성과 은혜를 다만 누리라는 말은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묵상에서는 다윗이 므비보셋에 베푼 호의를 ‘친절을 베푼 것’으로 번역한 회복역 성경 표현이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참고로 해당 원문은 ‘헤세드’(2617)인데, 조금 찾아보니 거의 모든 영어 성경은 이것을 ‘kindness’로, 그리고 대부분의 한글 성경은 ‘은총’ 혹은 ‘은혜’로, <킹제임스 흠정역>만 회복역처럼 ‘친절’로 번역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전에는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친절’을 베푼 것이 그의 아버지인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한 다윗의 인간적인 신실함 때문으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추구에서는 다윗이 “내가 그대에게 하나님의 친절을 베풀고자 하네”(I may show the kindness of God to you)(3절)라고 말한 사실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보였던 친절은 그가 ‘하나님의 친절’이라는 신성한 속성을 살아낸 결과임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묵상은 긍휼과 사랑이 느껴지는 예수님의 여러 행적들이 참 다윗이셨던 그분께서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친절”을 베푸신 것이기도 했다는 깨달음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1)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굶긴 채로 보낼 수 없다”시며, 기적적으로 사천 명을 먹이신 것(마 15:32-38). 2) 성전세에 관해 잘못 말한 베드로의 실수를 꾸짖지 않으시고, 낚시로 건져 올린 물고기 입에 은화 한 닢을 물려있게 해서 그것으로 성전세를 내게 하신 것(마 17:24-27). 3) 십자가에 달리신 극한 상황에서도 옆의 범죄자에게 “오늘 그대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덕담을 건네신(눅 23:39-43) 사례들이 떠올랐습니다. 솔직히 예전에는이런 가슴 뭉클한 사건들을 단순한 기적 행하심으로만 알았습니다.
<국어 대사전>(이희승 편저)에 따르면, ‘친절’은 “태도가 매우 정답고 고분고분함”을 의미합니다. 주 예수님은 위 사례들에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보이셨지만, 그럴 때 그분의 태도 또한 매우 친절하셨습니다.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사랑은 은혜의 근원이다.”, “친절(kindness)(인자)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의 하나님의 태도이다.”라고 하여 사랑과 은혜와 친절의 관계를 잘 구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과 주 예수님의 친절을 소개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에게도 ‘친절하라’고 말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개역 개정)(엡 4:32), “여러분은 …거룩한 사람들이니,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인자(kindness)와 … 오래 참음을 옷으로 입으십시오”(골 3:12)(한글 KJV, 새번역 등 참조), “사랑은 친절하고(5541)”(고전 13:4).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친절”(kindness)은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입니다(갈 5:22). 따라서 이러한 신성한 속성은 서두에 언급된 옛사람의 천연적인 ‘친절’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추구를 통해 제게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체험이 깊어도 다른 이에게 ‘친절’하지 못하다면, 그의 영적인 생활 어디엔가 결함이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게도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권위 있는 연구에 따르면,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을 감소시키고. 혈관을 확장시키는 옥시토신 분비를 늘려 준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친절한 인격과 하나 되어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은 물론 자신에게도 큰 축복입니다.
오 주님, 당신이 인성 안에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친절한 사람으로 발견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