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한 성경 교사였던 워치만 니가 ‘가장 영적인 사람은 가장 최근에 자신의 죄들을 자백한 사람’이라는 취지로 말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중에는 세상에 묻혀 살다가 주일 아침에 예배당에 가면 양심이 찔려 ‘주님 죄송합니다’ 식의 회개와 자백을 반복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주님을 위한 사역에 바쁘고 또한 그 열매가 많더라도 죄들을 자백하는 기도를 소홀히 한다면, 이 또한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아침에 아래 말씀을 묵상할 때 긴 믿음의 여정에서 이 ‘죄들을 자백하는 실행’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아울러 이 말씀을 실천할 때 함께 고려할 몇 가지 요점이 제 안에 정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하나님은 …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고(요일 1:9-10 상반 절).
첫째, ‘죄’가 아니라 ‘죄들’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한 사람을 통하여 죄(sin)가 세상에 들어왔다.”라고 말합니다(롬 5:12). 이것은 아담이 타락할 때 죄(단수)가 세상, 즉 타락한 인류 안에 들어온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죄가 ‘내 안에’ 더 구체적으로 ‘내 육체 안에 거한다’고 말합니다(7:17-18). 여기서 말하는 ‘육체’는 타락하고 부패한 사람의 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죄는 이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고’, ‘왕 노릇하며’, ‘사람을 지배하고’, ‘살아 있고’, ‘사람들을 속이고 죽이며’, ‘사람들 안에 거하며’,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할’ 만큼 인격화되어 있습니다(롬 5:12, 21, 6:14, 7:9, 11, 17, 20). 물론 하나님은 이 죄를 정죄하셨고(롬 8:3), 우리가 이 죄에 대해 죽은 사람이 되게 하심으로(yourselves to be dead to sin)(6:11) 우리를 이 죄로부터 해방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이 죄의 뿌리 자체가 뽑혀 나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죄는 지금도 거듭난 우리의 육체 안에 거하면서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기만 하면 언제든지 죄들(sins)을 짓게 만듭니다. 즉 우리가 어떤 환경 속에서 생각을 이 육체에 둘 때 주님과의 교통에서 즉시 끊어져 죄들을 짓게 되고 결과적으로 어둠이 밀려오는 영적인 죽음을 맛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롬 8:6). 이때 우리를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끊어지게 한 ‘그 절연체(들)’를 자백하고 깨끗이 씻어낼 것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위 본문의 배경입니다.
둘째, 여기서 말하는 죄들은 ‘구원받은 이후’에 지은 것들입니다.
위 말씀이 거듭난 이후에 우리가 지은 죄들을 가리킨다는 강력한 근거는
(1) 사도 요한이 ‘우리’라는 말로 죄 자백의 주체 중 하나로 자신을 포함시킨 것입니다.
(2) 또한 빛가운데 사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 존재가 쉽게 더럽혀져서 보혈의 씻음 없이는 빛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음을 체험으로 압니다. 즉 “목욕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지만” 여전히 “발을 씻을 필요”가 있습니다(요 13:10).
참고로 서두에서 소개한 워치만 니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생되는 한 가지 문제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죄에 대하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겼는데 또 무슨 씻음이 필요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믿음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당신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거나 깨어 있지 못함으로 당신의 악한 본성에 순종하여 더럽혀졌다면 당신에게는 씻음이 필요하다. 어떤 종류의 더러움이든 그것은 당신을 주님의 임재에서 떠나게 할 수 있다. … 죄를 범했다면 반드시 주님께 그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보혈의 씻음을 구해야 한다.
주님의 죽으심은 단번에 이루어졌지만 이 보혈의 효능은 영원하다. 이것은 구약에서 붉은 암송아지로 예표 되었다(민 19:2-22). 붉은 암송아지는 죽임당하여 더러움이 있을 때 사용하도록 재만 남기게 되어 있다. 세상 죄인은 속죄를 위한 희생이 필요할 뿐 아니라 또한 마땅히 이 희생의 「재」를 사용해야 한다”(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영적 전쟁, 한국복음서원, 1995, 18쪽).
셋째, 죄들을 지은 후 자백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일단 거듭났으면 그 이후에 지은 죄들로 인해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 우리의 실패와 허물들이 절연체가 되어 빛 안에 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즉시로 영적인 어둠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와 자식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대화가 끊어지고 냉기류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사망이 오면 평강이 없어지고, 눌리고, 영적인 일에 약하게 되고, 속박과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바람 빠진 타이어로 굴러가는 것처럼 믿음 생활이 힘들어집니다. 이처럼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갈 5:4) 상태로는 신앙생활이 버겁고, 안과 밖이 다른 위선 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영적인 생명이 성숙할 기회를 놓치게 되고(히 6:1),
(3)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혼인 잔치 참여를 거부당할 수 있습니다(마 25:12).
체험에 의하면, 우리가 주님 앞에서 자백해야 할 내용들은 생명의 성장의 정도에 따라 점점 깊어집니다. 즉 처음에는 누가 봐도 죄짓는 것이나 세상을 사랑한 것 등이 양심에 거리낌이 됩니다. 그러나 점점 빛이 강하게 다가올수록 우리가 육체와 자아와 천연적인 조성으로 주님의 일을 한 것조차도 그분 보시기에 가증한 것임을 보게 하십니다. 결국 그리스도 자신을 살지 못한 모든 시간들이 그릇되었음을 자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바울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만 그리스도를 살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추구했나 봅니다.
오 주 예수님,
당신의 효능 있는 보혈을 의지합니다.
순간순간 빛되신 당신께 돌이키고 그 안에 머물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