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본의 아니게 거짓말도 하고 가끔은 실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한 마디도 허투루 말씀하지 않으십니다(민 23:19). 특히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성취됩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주님의 약속 혹은 예언이 있는데, 그중에 가장 크고 위대한 예언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 16:18)입니다. 이러한 ‘내 교회’를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갈망은 아득한 영원 전부터 그분의 마음속에 있어 왔습니다(엡 3:9-11). 그럼에도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바로 이 예언의 성취, 즉 주님의 몸이 건축되는 것을 말하는 에베소서 4장 16절을 성경에서 가장 이루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합니다. 아침에 누린 아래 말씀은 이 위대한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는지와 그 과정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언하는 사람은 교회를 건축합니다. …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씩 신언할 수 있는데(고전 14:4 하, 31).
흔히 종교개혁은 1517년에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조리한 관행에 맞선 것을 기점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교회 모습을 되찾으려는 종교개혁에 몇 가지 ‘모토’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오직 성경’과 ‘만인제사장주의’가 위 본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전에는 소수만 라틴어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그것이 교권을 독점하는 소수의 성직 계급을 산출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번역한 이래로 지금은 성경이 보편화되었고, 교리적인 선포에 그치긴 했지만 모든 믿는 이가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는 진리가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위 본문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모든’ 거듭난 이들이 분량껏 ‘신언’(설교)할 수 있고, 그럴 때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건축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자세히 말한 후에, 이어진 14장 1절에서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더욱이 영적인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되, 특별히 신언을 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러한 권면을 일부 성직자만이 아니라 수신인인 고린도 교회 모든 구성원에게 했습니다. 이런 문맥의 배경을 바로 알 때, 목회자만 소위 설교권을 가진 현재의 교계 상황에 묶이지 않고, 아래에서 다룰 본문의 참된 의미와 부담을 만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신언하는 사람은 교회를 건축합니다” : 개역 성경은 이것을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라고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덕을’이 없습니다. 또한 ‘예언’도 국어 사전적 의미가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함’ 이므로 본문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즉 교회는 장래의 일을 미리 말한다고 건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어 회복역 성경은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감안하고 문맥의 취지를 살려 이것을 ‘(하나님) 말씀을 펼쳐 보인다’는 의미의 ‘신언’(申言)으로 번역했습니다(참고로 흠정역은 ‘대언’으로 번역함).
종교개혁 전보다 지금은 성경을 접하기가 훨씬 쉬워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더라도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성경 본문을 ‘소화’해서 청중 앞에서 말해내는 것(신언)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특별히 신언을 하도록 하십시오”(1절), “더 원하는 것은 신언하는 것입니다(5절)”, “이제 교회를 건축하는 데 뛰어날 수 있도록 구하십시오”(12절), “신언하기를 간절히 사모하십시오”(39절)라고 거듭 신언을 격려합니다. ‘신언’이 ‘교회를 건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간격을 극복하는 한 가지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처럼 성경을 ‘공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영의 음식’으로 보는 것입니다(마 4:4). 이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머리로 연구하는 대신에 ‘그 말씀으로 기도하는’(pray-reading) 방식으로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엡 6:17-18 상, 요 6:48, 57, 렘 15:16). 역대로 경건한 많은 믿는 이들이 이처럼 말씀을 들고 주님께 나아가 묵상하고, 간청하고, 누림으로 그 의미를 깨닫고 풍성한 공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할 때 누구든지 말씀 안에서 빛과 생명을 만지게 되고, 또 그것을 예배 중에 짧게 나눠서(신언해서) 성도들에게 생명과 빛을 공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요 1:4).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씩 신언할 수 있는데” : 이 말씀은 교회 집회 중에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23, 26절). 그러나 지금과 같은 1인 설교 중심의 예배 형태로는 이런 실행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예배 형태인, 특정인이 매주마다 동일한 청중을 향해 설교를 하는 실행은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최초의 신약 교회인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 8:1)는 성도가 수만 명이었지만, “이 집 저 집”에서 모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성경)”을 근거로 서로 “교통”하고, “떡을 떼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꾸준히 계속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행 21:20, 2:42). 물론 그 당시에도 예루살렘 교회에는 야고보, 베드로 등의 사도들과 복수의 장로들이 있었지만, 요즘처럼 매주 한 곳에 성도들을 모아 놓고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주일마다 그 많은 가정집을 돌면서 설교하기에는 대상이 너무 많고 시간도 제한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오래전에 읽었던 로버트 뱅크스(Robert J. Banks)가 쓴 <초대교회 예배 이야기>(IVP) (https://brunch.co.kr/@island4j/49)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이 책은 현재 우리가 처한 교계의 현실과 “온몸”이 “머리의 공급”을 받아 “자라고” “기능을 발휘함으로” “사랑 안에서 건축되는” 성경적인 교회(엡 4:16) 모습과의 간격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합니다. 이처럼 현실을 알고 가야 할 목표를 보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인 ‘내 교회’ 건축을 위해 더 전진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오 주 예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사,
모든 장애를 이기고 신언하여 교회를 건축하도록
우리 각 사람을 격려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