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10년이 시작되는 2020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덧없이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사는 매 순간이 보람된 날들이고 싶은 마음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주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혹은 이런저런 기록에 남아 있게 됩니다. 심지어 그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불화한 사이로(빌 4:2),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남의 믿음을 무너뜨린 이들로(딤후 2:17),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바울을 버린 이들로(1:15), 오네시보로는 자주 바울을 상쾌하게 하고 힘을 북돋아 준 인물로 소개되었습니다(1:16). 며칠 전 아침에 아래 말씀을 읽은 후에, 이번 주 내내 에바브로디도라는 한 사람을 감상하고 누렸습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여러분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 동역자요, 전우이고,
여러분의 사도이며, 나의 필요를 공급하는 사역자입니다(빌 2:25).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처럼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에 관해 남겨진 약간의 기록은 그가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매우 특이한 역할을 감당했던 한 신실한 형제였음을 알게 합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역할 : 위 본문에 의하면,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 필요한 물질을 채우도록 빌립보 교회에 의해 파송된 인물입니다. 흔히 알려졌듯이, 바울은 천막 만들어서 나온 수입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여러분이 준 것을 받아서 풍족합니다”(빌 4:18)라는 말씀을 볼 때, 그는 빌립보 교회의 지원을 받아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빌 1:5, 4:10, 15). 이러한 물질을 전달하는 일을 에바브로디도가 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그 당시 빌립보에서 바울이 갇혀 있던 로마까지는 약 1,800km로 40일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가리켜 “나에 대한 여러분의 봉사의 부족을 채우려고”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다”(2:30)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단지 물질을 전달하는 임무만 아니라 바울이 갇혔던 로마 현지에 남아 힘껏 일하면서 바울의 옥바라지까지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지위 : 교회의 후원으로 선교사로 파송 받거나 ‘BAM’(business as Mission)처럼 현지에서 사업과 선교를 병행해도 모두 선교사라는 호칭과 지위가 있습니다. 즉 요즘에 선교사라고 하면 소위 험지에 가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존경도 받고 본인도 긍지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이러한 선교사라기보다는 (선교사인) 바울을 먹여 살리는 일(선교)만을 죽을병이 걸릴 만큼 신실하게 했습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과연 지금 같으면 그런 일을 위해 자기 인생을 바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러한 일을 한 에바브로디도를 ‘형제, 동역자, 전우, 사도, 사역자’라는 다양한 호칭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중에 특히 제가 조금 시간을 들여 살펴본 것은 ‘사도’와 ‘사역자’라는 말입니다.
먼저 (여러분의) ‘사도’는 원문이 ‘아포스톨로스’(652)로서 ‘열두 사도’(마 10:2)라고 할 때와 같은 단어입니다. 개역 성경은 이것을 (너희의) ‘사자’(messenger)로 번역했으나, <Young’s Literal Translation> 등 최소한 5개의 영어 번역본은 이것을 apostle 즉 ‘사도’라고 번역했습니다. 물론 사도도 그 지위와 역할이 다 똑같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라는 원래의 뜻에 의하면 에바브로디도나 열두 사도나 모두 사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다음이 ‘사역자’(minister)라는 표현인데, 이 단어(레이투르고스, 3011)를 개역 성경은 여기서는 ‘돕는 자’라고 번역했으나, 히브리서 1장 7절에서는 같은 단어를 원뜻대로 ‘사역자’로 바르게 번역했습니다. 참고로 회복역 성경은 이 사역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2장 17절에 있는 ‘봉사’와 동일한 헬라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 헬라어 단어는 사역자를 가리키는데, 사역자의 사역은 제사장의 사역과 같다. 신약의 모든 믿는 이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다(벧전 2:9, 계 1:6).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방면에서 주님께 봉사하든지, 그것은 다 제사장의 봉사이다(빌 2:17, 30)” (각주 3).
이러한 추구와 묵상을 통하여 다음 세 가지가 제 마음 안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첫째, 위 ‘동역자’와 ‘사역자’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말씀 사역이나 에바브로디도가 물질로 자신을 돕는 일이나 모두 동일한 신약 사역의 일부로 여겼다는 것입니다(고전 12:5). 이 원칙을 조금 확대하여 적용해 본다면, 반드시 멀리 선교를 나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주어진 일들을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에서 해낸다면, 그 역시 신약의 사역의 일부를 감당하는 것입니다(고후 4:1, 빌 1:20-21). 왜냐하면 신약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도록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살아내고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머리이신 그분께서 몸인 교회를 통해 안배하신 것을 최선을 다해 실행한다면 그것은 존중받을 만한 일입니다(빌 2:29, 고전 12:11).
셋째, 한 몸 안의 지체들은 어떤 일에 관여하든지 그 이면에는 영적인 전쟁이 있습니다(빌 2:25, 마 16:18). 그리고 그 전쟁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은혜에서 떨어져 자기 자신을 살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죽을병이 걸렸지만 그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살았습니다(빌 2:30).
오 주님,
신실한 형제인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몸 안에서의
특별한 헌신과 수고의 본을 보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남은 날들 동안에 당신이 안배해 주신 일들에
충성을 다 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