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으면 나타나는 대표적인 노화 현상 중의 하나가 기억력 감퇴입니다. 소싯적에는 저도 한 기억력 했는데, 요즘은 정말 제가 저를 봐도 별로입니다. 그래서 기억력 감퇴도 늦추고 성경 말씀도 기억에 저장할 겸 몇 달 전부터 하루에 한두 구절씩 말씀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말씀은 고만고만한 단어들을 열거해 놓아서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아침에는 그 말씀을 외우고 누렸는데 오후나 저녁이 되면 그중에 한두 단어가 까맣게 생각이 안 납니다. 어떤 때는 새벽에 화장실 다녀와서 다시 잠들기 전까지 그날 말씀을 회상할 때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스스로 떠올려 보려고 애를 쓰다가 할 수 없이 성경을 펴서 답을 얻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아래 말씀을 묵상하다가, 문득 그동안 외웠던 것들 중에 이렇게 다섯 단어들이 열거된 세 구절이 더 생각났습니다. 하나는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내용이고, 다른 셋은 믿는 이가 반드시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이들을 함께 묵상할 때 제 안에 작은 빛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랑받는 거룩한 사람들이니,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인자와 겸허와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으로 입으십시오(골 3:12)
사도 바울은 바로 앞 구절들에서 ‘새사람’을 묘사한 후에(골 3:10-11), 바로 이어서 이 새사람의 구성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다섯 가지 미덕들을 위와 같이 열거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제일 처음에 나온 단어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inward parts of compassion)이라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무늬만 기독교인은 물론이고, 소위 정통교단에 속했고 성경 지식이 많고 아무리 특정 교리에 밝아도 그 존재의 바탕 안에 남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그는 새사람으로서는 자격 미달인 셈입니다. 이에 더하여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는 모습이야말로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의 속살이라는 점이 제 안에 새롭게 새겨졌습니다.
한편 아래 열거한 각 항목은 그들의 존재 자체이거나 사는 재미가 된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믿는 우리 안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타락의 요소들로서 반드시 엄중하게 처리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음행, 부정, 나쁜 정욕, 악한 욕정, 탐욕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여러분의 육체의 각 부분을 죽음에 넘기십시오. 곧 음행과 부정과 나쁜 정욕과 악한 욕정, 그리고 탐욕입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골 3:5).
위 다섯 단어들은 처음 보면 그 말이 그 말 같습니다. 조금 이해를 돕자면, 음행은 음란으로도 번역되고 부정은 불결 혹은 더러움입니다. 나쁜 정욕은 영어로 ’passion’ 혹은 ‘lust’인데, 욕심, 정욕, 색욕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악한 욕정은 영어로 ‘evil desire’입니다. 그나마 탐욕은 그 자체로도 감이 오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한 예로 음행은 그 덫에 빠지면 그 사람 자체와 그의 교회생활을 심각하게 손상시킵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고 엄숙히 경고합니다(골 3:6).
격분, 화, 악의, 모독, 더러운 말 :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이 모든 것, 곧 격분과 화와 악의와 모독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말을 버려야 합니다”(골 3:8).
격분(wrath, 3709)은 진노 혹은 분노로, 화(anger, 2372)는 노 혹은 진노로 번역되었습니다(개역 성경은 후자를 아예 생략함). 악의는 악독 혹은 그냥 악으로, 모독은 비방 혹은 신성모독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악의, 속임수, 위선, 시기, 악한 말 : “그러므로 모든 악의와 온갖 속임수와 위선과 시기와 일체의 악한 말을 버리고”(벧전 2:1):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이 다섯 단어가 담긴 구절에 대한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다섯 가지 부정적인 것들은 순서대로 기록되었다. 악의는 뿌리이자 근원이며, 악한 말은 표현이다. 속임수와 위선과 시기는 근원에서 점점 발전하여 표현에 이르는 단계들이다”(각주 2).
위와 같은 내용들을 추구하고 또 묵상하면서 제 안에 다음 세 가지가 정리되었습니다.
첫째, 바울은 위와 같은 항목들을 옷으로 입으라(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신성한 속성들(마 9:36, 14:14, 15:32, 11:29)은 원래 우리 안에는 없는 것들입니다. 대신에 우리 영 안에 영접되신 주님께서 마음에까지 거처를 확대하신 결과로 변화받은 성품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워낙 천성이 느긋해서 잘 참거나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천연적으로 착한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둘째, 본문은 또한 위 소극적인 항목들을 ‘죽음에 넘기라’ 혹은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수도승이나 금욕주의자들처럼 본성을 억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옛사람이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사실을 근거로 우리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문제입니다(롬 6:6, 8:13, 갈 5:24).
셋째, 위 네 구절의 동사는 모두 우리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명령형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 시대는 물론이고 다음 세대에 그에 따른 징계가 있습니다(마 12:36-37, 고후 5:10). 따라서 믿고 죽으면, 모든 것이 해피 앤딩은 아니라는 점이 우리를 깨어 있게 만듭니다.
오 주님, 당신의 신성한 속성들이 우리의 미덕들이 되게 하시고,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오니 모든 불의에서 떠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