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73회 - 주님, 저를 섬겨주세요.
에세이
청지기 , 2022-03-11 , 조회수 (327) , 추천 (0) , 스크랩 (0)


 젊었을 때 몽테뉴 수상록을 읽었습니다. 너무 오래전이라 책 내용이 가물가물하지만, 강한 인상을 받았던 한 대목은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몽테뉴가 친한 친구들을 불러서, 마치 선심 쓰듯이 남겨질 자기 딸의 혼사를 부탁하고, 심지어 지참금을 두둑이 들려 보내 달라고 요청한 부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친구들의 반응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부담을 지우는 몽테뉴의 이런 부탁에 진심으로 감사해하며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일반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이런 일이 자신을 ‘섬기는 사람’으로 소개하신 주님의 아래 말씀과 관련하여 문득 연상되었습니다.

 

누가 더 큽니까? … 상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눅 22:27).

 

 위 본문은 제자들이 자기들 중에 누가 가장 큰지를 놓고 다투는 상황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아침에 이 말씀을 읽을  때, 솔직히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섬기는 사람’(공동번역은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소개하신 부분이 잘 와닿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지  반대로 주님이 우리를 섬기신다는 개념은 낯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관련 구절들을 추구해 보니, 주님은 아래와 같이 같은 취지의 말씀을 몇 번 더 하셨습니다.

 

 “으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 온 것입니다(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마 20:27-28). “주인이 와서 노예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본다면,… 주인이 허리에 띠를 동여매고, 노예들을 상에 앉히고 나아와서 섬길 것입니다(눅 12:37).

 

 저는 위 본문들을 읽은 후에 1)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신다는 말씀이 왜 이렇게 어색하고 죄송스럽게 느껴지는지, 그리고 2) 그분이 섬기신 사례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주님 앞에서 고려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먼저는 이런 사상 자체가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모습과 정반대이기 때문에 낯선 것이었습니다(눅 22:25-26). 또한 많은 때 그분을 경배의 대상으로만 대하다 보니, 우리와 같은 사람(“사람의 아들”)이신 방면에는 상대적으로 덜 익숙합니다. 그 단적인 예가 성경에서 접하는 주님의 반말투의 화법입니다. 저는 그나마 몇 년 전에 예수님도 존대어를 쓰신 것으로 번역한 회복역 성경을 접하고 인식이 조금 바뀌긴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대한성서공회도 같은 맥락의 어법을 사용한 <새한글 성경 신약과 시편>을 출간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지 고압적이고 무례한 분이 아닙니다(마 11:29 상).

 

 이어서 주님께서 섬기러 오셨다면, 그분이 실제로 섬기신 사례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 그분을 앙망했습니다. 그러자 너무 잘 알려진 발 씻기 사례(요 13:4-5)만이 아니라, 기적과 치유 사건들을 포함하여, 그분께서 지상 사역 때 사람들을 돌보셨던 모든 사례들이 사실은 그들을 섬기신 것이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다시 볼 때, 주님을 세 번 부인한 후 뒤로 물러나 다시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아래와 같이 섬기신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요 21장).

 

 그분은 먼저 밤새도록 고기잡이에 허탕을 친 베드로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십시오”라고 조언하여 고기를 많이 잡도록 도우셨습니다(6절). 또한 밤샘 일로 허기진 그들에게 아침상을 직접 차려 놓으신 후에, “와서 아침을 드십시오.”라고 권하셨습니다(12절). 이 역시 그분의 때 맞는 자상한  섬김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감동적인 장면은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미안하고 죄송한 속내를 “내 양들을 먹이십시오.”라고 부탁하셔서 어루만져주신 것입니다(15절). 이렇게 혼이 목양 받은 베드로는 훗날 자신의 서신에서 주님을 ‘혼의 목자’로 소개했습니다(벧전 2:25). 오, 이 어떠한 섬김의 본인지요!

 

 이번 추구와 묵상을 통해 더 밝아진 것은, 위 베드로의 사례에서 보듯이 변덕 많고 복잡 미묘한 우리를 섬겨줄 충분한 능력과 자격과 크신 사랑을 가진 이는 주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많은 아들들인 우리를 맏아들인 자신의 형상과 똑같이 만드시는 특별한 위임을 받고 이 땅에 오신 분이니(요 4:34, 롬 8:29), 우리를 섬겨주시는 것이 그분에게도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섬기러 오신 그분께 나아가 ‘저를, 특히 복잡한 생각, 변덕 많은 감정, 고집 센 의지를 섬겨 주세요.’라고 요청드리는 것은 전혀 무례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주님과 우리는, 위 몽테뉴와 그 친구들 이상으로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당신이 우리의 주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섬기려고 오신 분이고,

이 순간에도 우리 영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섬기고 계심을 다시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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