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판소리 춘향전에 나오는 ‘사랑가’와 같은 사랑이 있는가 하면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나눴던 것과 같은 ‘플라토닉 러브’도 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 시작한 문장을 다른 사람이 끝맺을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정신적 결합을 이루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사실 저도 젊은 시절에 실존주의 철학 서적을 즐겨 읽었을 때는 이들과 비슷한 사랑을 시도해보기도 했습니다. 그 후 어떤 계기로 현재 몸담은 교회를 만났고, 거기서 사람에게 몸과 혼뿐 아니라 영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슥 12:1). 돌이켜 보면, 저의 인생은 제 안에 사람의 영이 있다는 것을 알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즈음에 저도 아래와 같은 아가페의 사랑을 비로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요일 4:16). 이 사랑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우리 또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말씀을 묵상할 때, 이러한 1)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내리사랑, 혹은 2) 사람 사이의 수평적인 사랑이 아니라, 3) 아래 본문 문맥에서 말하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즉 굳이 표현하자면 ‘아래에서 위로 하는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오직 성경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으로 본 적이 없는 것들이고,
귀로도 들은 적이 없는 것들이며,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들이다.”라고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고전 2:9)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후에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동되어 어떤 이는 신학을 하고, 또 어떤 이는 해외 선교를 나가고, 또 어떤 이는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들은 소위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며, 타 종교인들에게서도 그들이 믿는 대상을 위한 유사한 헌신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밖의 모습만 아니라 그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특징을 알고자 주님을 앙망했을 때 몇 가지 사례들이 생각나게 해 주셨습니다. 먼저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그분께서 “내 양들을 목양하십시오”라고 부탁하신 사건입니다(요 21:16). 그러므로 정말 사심 없이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는 주님께서 “여러분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계명들을 지킬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4:15). 참고로 여기서의 계명은 문맥상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즉각적인 말씀(레마)을 가리킵니다(15:10). 이외에도 “그대는 온 마음과 온 혼과 온 생각으로 주 그대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라는 말씀도 생각났습니다(마 22:37). 이런 말씀들을 토대로 아래 관련 각주를 읽을 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더 깊이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온 존재-영과 혼과 몸, 또 마음과 혼과 생각과 힘(막 12:30)-를 절대적으로 그분께 두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온 존재가 그분으로 점유되고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실질적으로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이다”(고전 2:9, 각주 1).
이런 추구와 묵상 후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분과의 더 깊은 연합 그리고 그러한 연합을 방해하는 우리의 천연적인 기질을 처리하시는 손길을 감수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을 참으로 사랑했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주님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고난과 순종을 함께 고백했구나 하는 빛이 있습니다.
문득 아래 찬송시가 생각나서 누리면서, 처녀의 몸으로 그 당시 오지였던 중국 본토에 와서 거기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워치만 니 한 명을 얻었던 영국인 선교사 바버 자매님의 본을 감상했습니다. 그녀는 참으로 일생동안 주님을 생명으로 누렸고, 그 생명의 흘러넘침으로 목양했으며, 즉각적인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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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난 받는 것이 내 길이라면/ 간고의 길 주가 정하셨다면/
주님과의 교통 더욱 친근해/ 순간순간 간격 없기 원하네
(3). 주님 자신 더욱 얻기 위하여/ 이 땅과의 연결 끊어진대도/
주님과의 사이 더 달콤하게/ 연결되어 주의 향기 누리리
(4) 외로운 이 길에 주 내 동반자/ 웃는 얼굴로 날 격려하소서/
주 은혜로 자아 벗어버리고/ 생명 분배하는 그릇되도록
오 주님, 당신은 우리를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원하십니다(엡 1: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만을 더 얻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임을
빛 가운데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