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새롭게 실행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을 하루에 10장(章)씩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함께 전화로 아침 부흥하시는 한 노 형제님에게 권해드렸던 것인데, 저도 이 기회에 함께 동참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조금 더 읽다 보니 아직 1월인데 벌써 사무엘기상 30장까지 읽었습니다. 그동안에는 특정 구절을 깊이 파는 식의 성경 읽기를 주로 했는데, 본문만 통독하는 것도 나름 유익이 있었습니다. 즉 통독 후에 기억에 남은 것이 별로 없더라도 저의 존재가 씻겨졌다는 분명한 느낌이 있습니다. 또한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 선명해졌습니다. 아침에 아래 말씀, 특히 ‘하나님의 선한 기쁨’(His good pleasure)에 대해 추구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기쁨을 위하여
여러분 안에서 운행하시어,
여러분이 뜻을 세우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행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빌 2:13).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방면을 말합니다. 따라서 위 본문 직전 구절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십시오”라고 말씀합니다(12절). 이어서 그는 위 본문을 ‘왜냐하면’(for)으로 시작하여 우리가 더욱 순종하여 구원을 이루어 내야 할 이유 그리고 순종의 대상이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것임을 밝힙니다. 바울은 우리의 순종과 구원을 이룸과 우리가 뜻을 세우고 또 행하는 이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한 기쁨을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에 대한 이해가 여기까지 이르자 ‘오 주님,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당신의 선한 기쁨에 대해 더 알기 원합니다!’라는 기도가 깊은 속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 후 원문을 찾아보니, ‘선한 기쁨’은 유도키아(2107)로서 ‘선함’과 ‘생각하다’가 내포된 한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영어 성경은 이것을 ‘good pleasure’(선한 기쁨)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개역 개정은 이것을 ‘기쁘신 뜻’으로,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은 위 회복역처럼 ‘선한 기쁨’으로 각각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한 기쁨 혹은 그분의 기쁘신 뜻은 또 무엇인지를 그분께 다시 앙망했을 때, 위 유도키아 단어가 쓰인 아래 에베소서 1장 5절과 9-10절 본문에서 마침내 그 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의 선한 기쁨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아들의 자격을 얻도록” 예정하셨습니다(엡 1:5). 즉 이것은 우리가 ‘아들의 자격’(휘오데시아, 5206) 혹은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갈 4:4-5, 롬 8:23). 혹은 그분의 선한 기쁨은 “만물이…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통일”되는 것입니다(9-10절). 이 둘은 모두 믿는 우리가 영이 거듭난 이후에, 혼이 변화되는 구원을 이루고, 최종적으로 썩지 않을 영광의 몸으로 변형되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쁨으로 계획하셨고, 또 친히 그것을 이루시려고 지금 거듭난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십니다.
위 본문에 대한 회복역 각주는 우리의 이해를 돕도록 그 과정을 이렇게 조금 더 설명해 줍니다. “뜻을 세우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서 일어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것이 우리의 영에서 시작되어(비교 빌 4:23), 생각과 감정과 의지까지 확산된다는 것을 가리킨다”(각주 5).
이 주제를 묵상하는 과정에서, 문득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선택하시기 전에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신 대목이 생각났습니다(막 6:12-13). 그분은 이런 일조차도 임의로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기도로 여쭙고 또 상의하신 것이 만져졌습니다. 또한 주님은 바울이 자신에게 맡겨진 신약 경륜의 성취를 위해 수고할 때도 “자기 안에서 운행하시는 분의 운행에 따라” 그리한 것을 생각나게 해 주셨습니다(골 1:29). 아울러 묵상 중에 누렸던 아래 찬송 가사도 새롭게 제 안에 다가왔습니다.
내 안에 거처 정하길 하나님 기뻐하니/ 밖의 봉사 열심 떠나 주 날 점유하게 해.
하나님의 원하심은 밖의 성취 아니요/ 내 안에 주 들어오셔 내 모든 것 됨일세(399).
주님은 우리에게 무슨 거창한 사역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매일의 평범한 삶 속에서 ‘주님이 하라고 시키시는 그 일’을 행하여 그분과 동역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울은 희생제물을 드리려는 자기의 선한 생각으로 그분의 요구를 무시했고 결과적으로 불순종했습니다(삼상 15:22). 반면에 다윗은 많은 경우 어떤 것을 실행하기 전에 먼저 여호와께 여쭈었습니다. 이런 추구와 묵상은 저 자신을 많이 폭로시켰습니다. 즉 자신의 소견을 따라 이것저것 하는 것이 너무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처럼 말씀으로 다시 깨우쳐 주시니 소망 가운데 주님께 돌이킵니다. 그나마 어떤 환경을 거친 후에 얼마 전부터 저희 부부가 잠들기 전에 함께 손잡고 기도하는 실행을 시작한 것은 그분께서 저희 가정 안에서 머리이신 그분 아래 통일되게 하신 작은 증거입니다. 주님의 긍휼이 무궁하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오 주님, 올 새해에는 우리 안에서 당신의 선한 기쁨,
당신의 마음의 갈망을 더 성취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