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저께 깊이 있는 설교로 소문난 어느 목사님 교회에 출석하는 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형제님은 한국에서 목회하다가 미국에 온 분인데, 우연히 알게 되어 작년부터 매일 전화로 성경 한 장씩 읽는 사이입니다. 지난주일 설교 제목이 ‘포도원의 일꾼’(마 20:1-16)이었는데, 목사님은 이것을 주님이 다 하시고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으니 다만 안식하라는 취지로 설교하셨답니다. 이런 관점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 8:13)라는 본문과 각주 내용을 빌려서 간략하게 답변을 드렸습니다. 즉 그 영만도 아니고, 우리 노력만도 아니고, 우리가 주도하되 그 영을 의지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갈 2:20 참조).
사실 이 문제는 소위 ‘행위 구원’과 관련하여 한국 교계 내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습니다. 만일 믿음만을 강조하고 행위(실천)를 소극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면, 보통은 관념론에 빠지거나 수동적으로 됩니다. 제게 전화한 위 형제님도 사실 자기네 교회 성도님들 상당수에게 그런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을 통해서 좀 더 명쾌한 답을 얻기를 기도하던 중에, 이번 주에 누린 아래 아침 부흥 교재 말씀과 여러 추구를 통해서 응답을 받았습니다.
더욱 부지런하여 여러분이 부름받은 것과 선택받은 것을 견고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러한 것들을 행한다면, 언제라도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여러분은 풍성하고 넘치는 공급을 받아,
우리의 주님이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에 들어갈 것입니다(벧후 1:10-11).
위 말씀에서 ‘견고하게 하십시오’, ‘이러한 것들을 행한다면’, ‘이렇게 할 때에’는 모두 우리의 적극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표현들입니다. 참고로 위 ‘행한다면’에 해당하는 ‘포이에오’(4160)가 신약에서 처음 사용된 것이 ‘요셉이 … 주의 천사가 지시한 대로 행하여 자기 아내를 데려오고’(마 1:24)입니다. 이처럼 ‘행함’은 “자기 아내를 데려오는 것”과 같은 사람 편에서의 구체적인 행동이 요구됩니다.
며칠 동안 위 인용 본문에서 행함의 대상으로 언급된 “이러한 것들”(these things)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을 행할 것인지를 묵상하고 추구했습니다. 그 결과, 그 행함의 대상은 바로 몇 구절 앞에서 말한, 믿음, 미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사랑, (신성한)사랑을 가리킴을 알게 되었습니다(5-7절). 이 부분에 대해 회복역 성경 각주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참고 자료를 통해 이해하고 누린 내용을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의 분량을 증가시킴: 믿음을 보통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으로 정의합니다. 그런데 이번 묵상에서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주목하고’(히 12:2), ‘그 이름(인격)을 영접하는 것’(요 1:12)으로 이해할 때, 믿음의 개념이 전보다 더 피부에 와닿았습니다. 즉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자신이나 남이나 환경보다도 주 예수님 자신을 먼저 주목하고, 그분을 생명으로 영접하고 또 영접함으로써(요 10:10 하), 우리의 “믿음의 분량”(롬 12:3)이 자라게 하는 “믿음의 행위”(살전 1:3)를 부지런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덕을 발전시킴: 뱅겔(1687-1752) 주석에 따르면, 여기서의 미덕’(virtue)은 “믿음의 결과(고후 4:13, 16)”이며, 이 미덕은 “이 용어의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활력 있는 행동(a strenuous tone of mind and vigour(벧후 1:13)”입니다. 즉 이것은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게 하고 모든 탁월한 속성들을 살아 내게 하는 생명의 에너지”를 가리킵니다(벧후 1:3, 각주 2).
지식이 자라가게 함: 베드로는 몇 구절 앞인2-3절에서 “주 예수님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피그노시스, 1922)을 말했고, 그의 서신서 맨 끝에서도 “그분(예수 그리스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권고합니다(벧후 3:18).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온전하고 체험적인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고 계시됩니다.
자제(혹은 절제): 이것은 “자신의 감정과 갈망과 습관을 통제하고 제한하는 것”입니다. 이 자제는 바울에 따르면 감독의 조건(딤전 3:2), 그리고 “나이 많은 남자들”이 권유받는 항목 중 하나입니다(딛 2:2).
인내: 자제가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라면, 인내는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을 견디는 것입니다(롬 5:3, 약 1:3).
경건(godliness): 우리는 자신을 통제하고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을 견딤으로써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 경건, 즉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활을 발전시키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딤전 3:16, 4:7, 딤후 3:12).
형제 사랑: 베드로 전서 1장 22절은 우리가 “진리에 순종하여 자기 혼을 정결하게 할 때” 비로소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는 것”(히 13:1)과 “형제 사랑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롬 12:10) 역시 우리 편에서의 동역이 요구됩니다. 자동으로 되지 않습니다.
아가페 사랑: 거듭난 사람이 가져야 할 행위의 첫 항목이 믿음이라면 그 마지막 항목은 신성한 사랑(아가페, 26)을 넘치게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 우리가 부지런히 발전시켜야 할 항목이며, 옛 기질이 부인되고 영적인 생명이 자람으로써 생명 안에 있는 신성한 본성이 우리 존재를 적시고 밖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유튜브로 소개된 홍의봉 감독님의 영화 <대영광의 그날을 위하여>를 잠시 둘러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 초반부에서 주인공(한국 교회 대형 교회 목사 출신)은 주님으로부터, 머리로만 주님을 아는 것과 믿음에 행위가 수반되는 것을 행위 구원으로 오해하는 잘못을 지적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이 영화 시나리오 내용 모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 부분은 귀 담아들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열고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받아들이고(렘 15:16), 온종일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분을 구원으로 풍성한 공급으로 받아 들일 때(롬 10:13), 위 베드로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결코 실족하지 않을 것이고, 장차 그분의 영원한 왕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행위 구원과 무관하며, 우리가 부지런히 추구해야 할 것들입니다.
오 주 예수님, 우리의 남은 날들이 신성한 본성을 가진 신성한 생명이
우리 존재 안에서 자라고 확장되는데 부지런히 동역하는데
쓰여지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