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67회 - 실재를 붙들면, 죽을 때 후회가 없다
에세이
청지기 , 2022-01-28 , 조회수 (277) , 추천 (0) , 스크랩 (0)


얼마 전부터 주일 오후에 한 노부부 형제자매님 댁에 가서 그 주에 누릴 말씀의 핵심에 대한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참고로 요즘 제가 속한 교회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실재(reality, 알레데이아, 226)가 무엇이며, 어떻게 이 실재를 얻을 수 있는지를 반복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노부부 중 자매님에게 먼저 ‘자매님 탁자 위에 놓인 컵은 실재인가요?’라고 여쭈었더니, ‘실재이지요’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만일 제가 이 유리컵을 지금 바닥에 던져 산산조각을 낸다면 그때도 이 컵이 실재인가요?’ 했더니 ‘실재가 아니지요’라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과연 무엇이 영원하고 인생 전부를 걸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추구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참된 ’(혹은 ‘실재’)에 대해 더 많이 이해가 되고 만져짐이 있었습니다. 최소한 ‘실재가 아닌 ’에 대한 분별이 전보다 더 예민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머리이신  안으로 자라야 합니다(엡 4:15)

 

 

무엇이 참된 것(실재)인가?사실 꼭 기독교인들만 진리(혹은 실재)를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살려는 사람은 모두 한 번쯤은 무엇이 참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변은 제각각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위키백과는 진리를 ”사람의 생각, 지식, 견해 등에 상관없이 언제나 변함없는 정확한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실용주의자들은 이에 대하여 “고정된 진리는 없으며 유용한 것이 진리”라고 하고, 논리학자들은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충족이유율과 같은 사유법칙과 논리에 어긋나지 않는 정당한 사고가 진리’라고 하고, 불교 신자들은 “고제, 집제, 멸제, 도제의 4성제(四聖諦, catu ariya sacca)”가 진리라고 할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을 갖는다고 말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행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요일 1:6)라는 말씀에 나오는 진리를, 회복역 성경 주석은 “헬라어로 이것은 (공허와 대립되는) ‘실재’, ‘진실’, ‘정확’, ‘참됨’, ‘성실함’을 의미한다.”고 정의합니다. 또한 “이 단어는 신성한 계시의 내용인 신성한 경륜의 모든 실재”를 가리킨다고 하고, 이어서 ‘신약 성경에서 백번 이상 사용된 ‘진리’는 1) 하나님, 2) 그리스도, 3)  , 4) 신성한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 5) 믿음의 내용 … 7) 참됨, 진실함, 성실함, 정직함 … 이고 ”매번 쓰일 때마다 그 의미는 문맥에 따라 정해진다.”라고 했습니다(각주 5 참조).

 

따라서 제가 위 에베소서 문맥을 따라 이 본문을 묵상한 후에 깨달아진 것은, 여기서의 참된 (혹은 실재) 우리가 그것을 붙들면(말하면) 결과적으로 “머리이신  안으로 자라게 하는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를 주님의 몸 안에서 영적으로 자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성경 지식이나 교리 공부나 윤리 도덕적인 가르침은 어느 정도 도움은 되지만, 결코 그 자체가 우리를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신( 3:4),  나아가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충만 되시는 만이 우리를 참되게 자라게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참된 것’에 대한 해당 각주도 같은 취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혹은 참된 것을 말하고. 4장 14절에 있는 속임수와 오류와 대조된다. 사람들의 속임수 안에서 가르침의 바람에 밀려다니다가 오류의 체계에 빠지는 것은 참된 것을 붙잡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참된  문맥에 따르면, 분명히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킨다이 둘은 참된 것이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이러한 참된 것을 붙잡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야 한다.”(각주 2).

 

이런 추구를 하면서 깊은 속에서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고 그냥 ‘참된 것’(실재)은 ‘죽을 때 후회하지 않게 만드는 것’ 혹은 ‘깊은 속이 공허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진리이다’(요 14:6)라고 하신 분을 꽉 붙잡고, 그분 자신의 충만인 주님의 몸(엡 1:23)으로 건축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듦(말함):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한 가지 더 새롭게 만져진 것은 ‘사랑 안에서’(in love)라는 문구였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말하는 것’(speaking(holding) the truth)은 다름 아니라 “주인이 맡긴 집안 식구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나눠 주는 (마 24:45)이어야 합니다. 혹은 이 말은 단지 어떤 성경 지식의 전달만이 아니라 “진리대로 사는 ”(공동번역)을 보여주는 것을 함축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동기가 주님을 사랑한 결과이어야 하고(계 2:4), 몸 안의 지체들이 영적으로 건강한 음식을 받아먹어 자라게 하려는 배려와 수고의 결과이어야 합니다(엡 4:25). 이것이 ‘사랑 안에서’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 문득 제 안에 ‘식당 ’과 ‘집밥’의 대조가 떠올랐습니다. 만일 어떤 설교자 혹은 성경 교사 입에서 나온 공급이 ‘식당 밥’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오래 받아먹으면 (영적인) 건강에 무리가 올 수 있습니다. 솔직히 가끔은 공급하는 일을 하는 저 자신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돌이킴이 있습니다. 한편 최근에 읽은 아래 내용은 ‘집밥’이 무엇인지에 대한 작은 힌트를 제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워치만 니는 집회에서 온순하게 처신했다. 말할 때는 조금만 움직였지만 영향력은 컸다. 그 영향력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그 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집회서 큰소리로 기도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한 번도 제지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목소리 높이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그는 살아 있었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소유하였기에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을 사랑하도록 매혹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것이 필요하다”(WL, CWWL, 1978. Vol 1, p.559).

 

오 많은 좋은 말들과 가르침이 넘쳐나는 이 때, 이처럼 듣는 이들이 주님을 더 사랑하게 돕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도록 돕는 ‘참된 것’(실재)을 말함이, 마치 ‘집밥’이 그립듯이 그리워집니다.

 

 

 주님우리 자신부터 그러한 실재를 붙들고 

말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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