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에 반쯤 담긴 물을 보고, 한 사람은 물이 반밖에 안 남았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보는 시각에 따라 같은 내용도 다르게 다가옵니다. 돌이켜보면, 제게도 제 인생의 큰 전환을 가져온 시각 조정의 때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 ‘시각 조정’이라는 말은 한때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젊은 시절을 보내며 국가와 사회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던 이들 사이에 회자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스스로를 깨어있다고 생각하던 그들은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으로 갖게 된 기존의 시각을 조정하는 방편으로 <해방 전후사의 인식>, <제3세계의 이해>, <난쏘공> 같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저도 그런 무리 중 한 명으로 살던 어느 날 주님의 주권적인 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경륜>(한국복음서원)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제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시각 조정’을 받은 셈입니다.
아침에 읽은 아래 말씀도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딤전 1:4)의 관점에서 봄으로써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이 주제와 관련된 몇 가지 사례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알아 주님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고전 2:16).
한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찰스 M. 쉘돈)라는 책의 영향으로 책 제목처럼 살아 보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위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We have the mind of Christ)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쉘돈의 접근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여전히 우리가 주체이고 단지 ‘그분의 생각’만을 취하여 살아보려는 시도였다면, 후자는 주님 자신이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인 영 안에 들어오신 후에(요 3:6 하, 골 1:27), 그분의 생각을 우리의 혼의 일부인 생각에 주입하셔서 그 결과 그분의 생각이 우리 생각이 된 상태를 말합니다.
신약성경 회복역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하나이므로, 그분께서 소유하신 모든 기능을 우리도 갖고 있다. 생각은 인지하는 기능, 즉 이해하는 기관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생각이라는 기관이 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아시는 것을 우리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생명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각도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에서부터 우리의 생각을 적시시어 우리의 생각을 그분의 생각과 하나가 되게 하셔야 한다.”(각주 1).
아침에 이 말씀과 위 각주 내용을 묵상할 때, ‘생각을 적신다’는 개념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몇 구절(롬 8:6, 엡 4:23, 롬 12:2, 고전 1:10, 빌 2:2, 4:2, 롬 15:5)이 떠올랐습니다. 아울러 우리의 생각이 다른 무엇에 점유되고 사로잡혀 그분의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거나, 반대로 우리의 생각을 적시게 된 다음 사례들이 생각났습니다.
기존의 성경 지식으로 인한 불일치: 주 예수님은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에게, “그대의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23). 이때 그분의 생각은 ‘지금’ 살리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이에 대하여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압니다”라고 반응했습니다(24절). 부활 시점에 현저한 차이가 납니다. 마르다는 자기의 과거 성경 지식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현재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윤리 도덕적 시각으로 인한 불일치: 주 예수님은 지상 사역 어느 시점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제삼 일에 살아나게 될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마 16:21). 그런데 베드로는 이에 대해,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력히 반대하며 심지어 주님을 책망(rebuke, 에피티마오)했습니다. 아마도 스승을 아끼려는 선한 의도가 베드로의 생각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선한 의도조차도 많은 때 주님의 현재의 생각을 오해하게 하고 그분의 경륜적인 움직임을 방해합니다. 실제로 윤리적인 가르침이나 교훈을 얻고자 성경을 보는 것은 말씀 안에 녹아 있는 주님의 신성한 생각을 만지지 못하게 막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계시로 인한 일치: 위 두 사례와 달리, 이번 사울의 사례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생각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제공합니다. 사실 사울에게 주 예수님은 그분의 이름만 불러도 잡아 가둘 정도로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행 9:14, 21). 그러나 어느 날 위로부터 오는 빛 비췸과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행 9:4)라는 음성이 주님을 향한 그의 부정적인 생각에 큰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빛가운데 주님을 만나면 ‘자신을 혐오하고’(I abhor myself)(욥 42:6), ‘죽은 자로 여기며’(롬 6:6-7), ‘그분을 아는 지식을 가장 탁월한 것’(빌 3:7-8)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경험한 결과일 것입니다.
조금 더 넓게 이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전에 그 앞의 문맥에서 ‘영적인 사람’(the spiritual man)(15절)과 ‘혼적인 사람’(a soulish man)(14절)을 언급합니다. 이 두 개념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데 쉽게 말해서 영적인 사람은 거듭난 영(주님께서 영으로 내주하시는)이 그의 생각, 감정, 의지를 주관하는 사람이라면, 혼적인 사람은 이러한 영의 인도와 통제를 무시하고 자기 생각, 느낌, 결단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기 생각이 강하고 소중해서 누가 그것을 교정하려고 하면 잘 받지 못하고 반발합니다.
저 역시 이러한 사람으로 오랫동안 살아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긍휼로 주님 자신께서 흙 그릇인 우리 안에 생명으로 담기시고 더 풍성히 담기사 사탄과 하나 된 자기만을 표현하던 우리를 하나님의 신성한 속성과 미덕을 표현하는 존재들로 만드시려는 ‘주님의 생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내 생각을 접고 주님의 생각을 제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전보다 더 쉬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 조정은 과거에 있었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더 선명하고 깊게 이뤄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오 주님, 오늘도 저의 생각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사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