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64회 -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할 것인가?
에세이
청지기 , 2022-01-07 , 조회수 (309) , 추천 (0) , 스크랩 (0)


최근 들어 평생 주님을 믿고 섬겨온 몇 분이 이 땅에서의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일종의 관성이 있어서 심각한 전환의 때를 갖지 않는 한 지금 살고 있는 그 방향으로 가다가 그 연장선에서 어느 날 생을 마감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시 90:10)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즘은 말로는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만 현재까지는 대부분이 모세가 말한 그즈음에 인생을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나이가 60줄에 들어서면서 주변 분들의 임종 소식을 들을 때,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려해 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 읽기 진도를 따라 아침에 읽은 웃시야 왕의 이야기는 저를 다시 한번 깨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사랴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은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궁중 일을 다스리며 국민을 치리하였더라(왕하 15:3-5)

 

 

웃시야(Uzziah) 왕이 나병이 걸린 이유가 따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처음 위 말씀을 읽었을 때는 마치 왕이 산당을 제하지 않아서 여호와께서 나병으로 치신 것처럼 다가왔습니다. 또한 웃시야 왕 이야기가 분명한데 위 본문은 ‘아사랴’(Azariah) 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좀 더 분명한 이해를 위해 회복역 성경 해당 각주를 읽어보니, 간략하게 “역대하 26장에서는 웃시야로 불림”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주대로 역대하 26장을 찾아 읽어보니 웃시야 왕이 나병에 걸리게 된 전후 사정이 거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두 이름의 차이에 대해서는 그 당시 제사장 이름도 동일하게 ‘아사랴’(대하 26:17)이므로 혼동을 피하려고 왕은 웃시야로 했을 것이다. 혹은 아사랴는 본명이고 웃시야는 대외적인 호칭이라는 견해가 있음).

 

 

예전에 솔로몬 이 말년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자, 여호와께서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왕상 11:9-10) 듣지 않는 지경에 까지 타락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타락하게 된 이유가 다음과 같은 여호와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방 여인을 취한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보고 깨였던 적이 있습니다. 즉 솔로몬의 인생은 이미 이때부터 배도로 흘러가도록 방향이 잡히게 된 것입니다.

 

 

 “왕이 바로의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왕상 11:1-2).

 

 

같은 맥락에서 웃시야 왕이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민 3:10, 18:7)을 주제넘게 시도한 것도  그 사건만 보면 말이 안 되는 사건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전조 증상이 있었다는 것을 관련 본문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즉 그가 십육 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을 치리하면서 이룬 여러 업적이 그를 교만하게 했던 것입니다(대하 26:6-15).

 

 

저가 강성하여지매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팔십 인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 ….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었고 문둥이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졌고 별궁에 홀로 거하였으므로 그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국민을 치리하였더라”(대하 26:16-21).

 

 

이번에 추구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웃시야가 주제넘은 죄를 지었을 때 나병에 걸렸을 뿐 아니라 커다란 지진도 있었다는 것입니다(암 1:1, 슥 14:5 참조). 그런데 유명한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 지진이 바로 그의 분향 사건 때에 일어났다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더니 성전에 틈이 갈라지고 밝은 태양 광선이 그 사이로 들어와 왕의 얼굴을 덮쳤다. 즉시 그에게 문둥병이 발하기 시작했으며, 성 앞 엔로겔이라 불리는 곳에서는 산이 반쪽이 나서 서쪽 산이 4 펄롱(대략 800미터 가량)을 움직여 동쪽 산 있는 곳에 서게 되니 왕의 정원과 도로들이 심하게 망가졌다”(유대인 고대사(Jewish Antiquities) 9권 10장 42절).

 

 

그렇다면 이처럼 여호와를 노하게 함으로 지진이 나고 나병이 걸려 웃시야의 말년이 비참하게 된 그 내면의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웃시야가 1) 하나님을 구하는 삶을 어느 시점에서 중단한 것과(대하 26:5) 2) 나라가 융성한 것이 자기가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임을 망각한 것입니다(15절).

 

 

그렇다면 위 솔로몬이나 웃시야가 특별히 타락한 사람이었기에 이처럼 처음 시작은 좋았으나 말년이 비참하게 되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하면서 얼마간의 수고와 봉사를 통해 어떤 구체적인 성과를 얻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 때문임을 망각하고 은근히 자신의 업적으로 자랑하려는 타락한 본성이 제 안에도 있음을 봅니다. 만일 이것이 처리되지 않은 채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인 누림과 안식은 없는 상태에서 타성을 따라 계속 봉사한다면, 웃시야와 같은 주제넘은 일은 우리 중 누구에게서도 재차 일어날 수 있음을 깊이 느낍니다.

 

 

얼마 전에 한 형제님이 SNS에 올린 대만의 한 노 형제님 부부 이야기는 제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 노 형제님은 결혼한 그다음 날부터 자매님과 매일 아침 30분에서 1시간씩 기도하는 생활을 통해 평생을 대학생과 젊은이들을 목양해 오셨답니다. 그 결과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비록 봉사 일선에는 나서지 않더라도 여전히 기도와 말씀으로 젊은이들을 목양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 이런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황혼의 삶이 제게도 있게 되기를, 또한 현재의 저의 기도생활이 더 강화되기를 간절히 주님께 구했습니다.

 

 

 주님
 마지막 때에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당신의 긍휼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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