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58회 -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감
에세이
청지기 , 2021-11-26 , 조회수 (537) , 추천 (0) , 스크랩 (0)


어떤 성경 말씀은 귀에는 익숙하지만 정작 그 말씀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은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감’이라는 말도 그중 하나입니다. ‘은혜’니 ‘보좌’니 혹은 ‘나아감’ 같은 한국말은 그리 어려운 용어도 아니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표현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은혜 보좌 앞에 함께 갑니다”로 시작되는 찬송(986)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삶 속에 실제로 적용하려고 하면 정작 어떻게 하는 것이 은혜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영적인 영역의 이야기이고, 특히 ‘보좌’라는 말이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안 쓰는 말이고, ‘보좌’ 그러면 저 멀리 하늘 어디쯤 있을 듯하여 공간적인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국제 집회 참석을 위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다녀온 후, 근 2주를 감기몸살로 옴팡지게 아팠습니다. 고열과 기침은 물론이고, 목이 부어 침 넘기는 일도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을 참아야 겨우 가능했습니다. 대추차 끓여 먹고, 에드 빌 먹고 버티다가 차도가 없어서 결국에는 항생제를 먹어야 했습니다. 며칠을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자다가 깨기를 반복하며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고 있자니, 평소에 안 하던 짓이라 적응이 잘 안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침 부흥 책자에서 아래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저는 침대에 누워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 주님, 이 시간 이 말씀이 말하는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 원합니다. 오 주 예수님, 제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입게 하여 주옵소서!” 그 후 조금 더 힘을 내어 이 말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신약 성경 회복역 해당 각주(히 4:16 각주 2)를 읽어보았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여기 언급된 보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이다(계 4:2). 하나님의 보좌는 온 우주에 대한 권위의 보좌이다(단 7:9, 계 5:1). 그러나 믿는 이들인 우리에게는 은혜의 보좌가 되며, 이것은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 덮개(시은좌 25:17, 21) 상징되었다. 이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이기도 하다(계 22:1).

 

여전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늘에 있는 하나님과 어린양, 곧 그리스도의 보좌로 갈 수 있는가? 그 비결은 4장 12절에서 언급된 우리의 영이다. 하늘에 있는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 8:34) 바로 그분은 또한 지금 우리 안에( 8:10),  하나님의 처소가 있는( 2:22) 우리의  안에 계신다(딤후 4:22).(중략)

 

오늘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처소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영이 하늘의 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사다리로서 땅에 있는 사람들인 우리를 하늘로 연결시키시고, 하늘을 우리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킬 때마다, …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문을 통해 들어가서하늘에 있는 은혜의 보좌를 만진다.

 

위 내용을 읽으면서 ‘은혜의 보좌’와 관련하여 제 안에 더 선명하게 정리되는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1. 어디에 은혜의 보좌가 있는가?: 구약에서 ‘속죄소’(the mercy seat)는 지성소 안에 놓여 있었습니다(히 9:4-

5). 그런데 놀랍게도 로마서 3장 25절은 부활 후에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 영 안에 들어오신 주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속죄소의 실재이심을 말씀합니다(대다수 번역본은 이것을 ‘화목 제물’(힐라스모스(2434), 요일 2:2)로 오역함. 그러나 원문은 ‘힐라스테리온’(2435)이므로 같은 단어가 쓰인 히브리서 9장 5절처럼, 이곳도 화목 제물이 아닌 ‘화해 장소’(속죄소 혹은 자비석)로 번역되어야 함). 따라서 체험의 방면에서 말한다면신약 시대에 ‘은혜의 보좌 거듭난 사람의  안에 있다고   있습니다.

 

2. 어떻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가?구약시대에 속죄소가 놓인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께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을 제거하시고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을 여셨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님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히 10:19-20, 22). 따라서 우리가 현재 어떤 상태에 놓여 있든지 우리의 방황하는 혼(성소)에서 거듭난 영(지성소)으로 돌이키기만 하면 즉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돌이켜 내주하시는 그분을 앙망하는 것이고영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가?사람들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면 “때를 따라 도움을 얻는다”고 하니까 거기 가면 자신들의 필요가 즉각 즉각 해결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이것은 주로 ‘은혜’의 정의에 대한 오해 때문으로 보입니다(고후 12:8-9 참조). 그러나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속죄소에 나아간 이유는 죄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 편에서는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실 기회를 잡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신약 시대인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지된다고 봅니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1-22).

 

위 은혜의 보좌에 관한 말씀을 묵상할 때 떠올랐던 아래 말씀 또한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일 수  있습니다. 즉 아래 본문에서 우리가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이라면, 그 결과 그분에게서 흘러나온 어떤 것이 우리 존재를 적시고 또한 우리 존재를 통해 나타나는 것(“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는 ”) 또한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 가야 할 주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게서 비롯됩니다”(고후 3:18).

 

즉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에게서 말씀을 들으며, 그분의 영광으로 우리 존재가 적셔져서 그분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 주 예수님, 이 시간 우리의 참된 필요는 주님 자신임을 고백합니다.

매 순간 주님께 돌이켜 ‘긍휼의 자리’에서 머물며

당신의 영광을 바라보고, 적셔지고, 또 반사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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