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성경 말씀은 귀에는 익숙하지만 정작 그 말씀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은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감’이라는 말도 그중 하나입니다. ‘은혜’니 ‘보좌’니 혹은 ‘나아감’ 같은 한국말은 그리 어려운 용어도 아니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표현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은혜 보좌 앞에 함께 갑니다”로 시작되는 찬송(986)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삶 속에 실제로 적용하려고 하면 정작 어떻게 하는 것이 은혜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영적인 영역의 이야기이고, 특히 ‘보좌’라는 말이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안 쓰는 말이고, ‘보좌’ 그러면 저 멀리 하늘 어디쯤 있을 듯하여 공간적인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국제 집회 참석을 위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다녀온 후, 근 2주를 감기몸살로 옴팡지게 아팠습니다. 고열과 기침은 물론이고, 목이 부어 침 넘기는 일도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을 참아야 겨우 가능했습니다. 대추차 끓여 먹고, 에드 빌 먹고 버티다가 차도가 없어서 결국에는 항생제를 먹어야 했습니다. 며칠을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자다가 깨기를 반복하며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고 있자니, 평소에 안 하던 짓이라 적응이 잘 안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침 부흥 책자에서 아래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저는 침대에 누워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 주님, 이 시간 이 말씀이 말하는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 원합니다. 오 주 예수님, 제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입게 하여 주옵소서!” 그 후 조금 더 힘을 내어 이 말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신약 성경 회복역 해당 각주(히 4:16 각주 2)를 읽어보았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여기 언급된 보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이다(계 4:2). 하나님의 보좌는 온 우주에 대한 권위의 보좌이다(단 7:9, 계 5:1). 그러나 믿는 이들인 우리에게는 은혜의 보좌가 되며, 이것은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 덮개(시은좌, 출 25:17, 21)로 상징되었다. 이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이기도 하다(계 22:1).
여전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늘에 있는 하나님과 어린양, 곧 그리스도의 보좌로 갈 수 있는가? 그 비결은 4장 12절에서 언급된 우리의 영이다. 하늘에 있는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롬 8:34) 바로 그분은 또한 지금 우리 안에(롬 8:10), 즉 하나님의 처소가 있는(엡 2:22)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딤후 4:22).(중략)
오늘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처소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영이 하늘의 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사다리로서 땅에 있는 사람들인 우리를 하늘로 연결시키시고, 하늘을 우리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킬 때마다, …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문을 통해 들어가서, 하늘에 있는 은혜의 보좌를 만진다.”
위 내용을 읽으면서 ‘은혜의 보좌’와 관련하여 제 안에 더 선명하게 정리되는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1. 어디에 은혜의 보좌가 있는가?: 구약에서 ‘속죄소’(the mercy seat)는 지성소 안에 놓여 있었습니다(히 9:4-
5). 그런데 놀랍게도 로마서 3장 25절은 부활 후에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 영 안에 들어오신 주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속죄소의 실재이심을 말씀합니다(대다수 번역본은 이것을 ‘화목 제물’(힐라스모스(2434), 요일 2:2)로 오역함. 그러나 원문은 ‘힐라스테리온’(2435)이므로 같은 단어가 쓰인 히브리서 9장 5절처럼, 이곳도 화목 제물이 아닌 ‘화해 장소’(속죄소 혹은 자비석)로 번역되어야 함). 따라서 체험의 방면에서 말한다면, 신약 시대에 ‘은혜의 보좌’는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어떻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가?: 구약시대에 속죄소가 놓인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께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을 제거하시고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을 여셨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님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히 10:19-20, 22). 따라서 우리가 현재 어떤 상태에 놓여 있든지 우리의 방황하는 혼(성소)에서 거듭난 영(지성소)으로 돌이키기만 하면 즉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돌이켜 내주하시는 그분을 앙망하는 것이고, 영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가?: 사람들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면 “때를 따라 도움을 얻는다”고 하니까 거기 가면 자신들의 필요가 즉각 즉각 해결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이것은 주로 ‘은혜’의 정의에 대한 오해 때문으로 보입니다(고후 12:8-9 참조). 그러나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속죄소에 나아간 이유는 죄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 편에서는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실 기회를 잡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신약 시대인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지된다고 봅니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1-22).
위 은혜의 보좌에 관한 말씀을 묵상할 때 떠올랐던 아래 말씀 또한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일 수 있습니다. 즉 아래 본문에서 우리가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이라면, 그 결과 그분에게서 흘러나온 어떤 것이 우리 존재를 적시고 또한 우리 존재를 통해 나타나는 것(“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 또한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 가야 할 주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게서 비롯됩니다”(고후 3:18).
즉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에게서 말씀을 들으며, 그분의 영광으로 우리 존재가 적셔져서 그분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 주 예수님, 이 시간 우리의 참된 필요는 주님 자신임을 고백합니다.
매 순간 주님께 돌이켜 ‘긍휼의 자리’에서 머물며
당신의 영광을 바라보고, 적셔지고, 또 반사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