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53회 - 시므온의 눈에 비친 아기 예수
에세이
청지기 , 2021-10-22 , 조회수 (311) , 추천 (0) , 스크랩 (0)


한국 방문 기간에 한 형제님에게서 10여 년의 수고 후에 막 출판하신 책 한 권을 선물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이 책 안에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인 BC 10세기경에 고대 유대인들이 중국에 들어갔고, 한자와 중국의 고전에도 성경의 가르침이 반영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형제님이 학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으니 불어 원문을 번역한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분은 모 대학 현직 경제학 교수입니다.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땄습니다. 상당한 한문 실력도 갖췄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도 신화(神化, deification) 혹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사상이 한자와 중국의 대표적인 경전들 안에 담긴 증거들을 이 책이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말도 이 분이 성경 이해에도 조예가 깊음을 말해줍니다. 이런 분을 불문학도, 혹은 경제학자, 혹은 한학자 혹은 성경 연구가 중 어느 하나로만으로 규정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어느 한 사람도 다양한 방면과 특징들이 있는데,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예수님은 더욱 그러하십니다. 따라서 그분을 구주’(눅 2:11) 혹은 ‘우리의 생명’(골 3:4)으로 인식하는 것은 물론 귀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아침에 “주님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을 약속받은 시므온(Simeon)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말한 내용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면서, 주님에 대한 저의 인식이 전보다 더 넓어짐을 경험했습니다.

 

 

시므온은 아기를  팔로 받아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주재자시여주님의 말씀대로 이제는 주님의 노예를 평안히 놓아주십니다.

 눈이 주님의 구원 보았는데(눅 2:28-30).

 

 

생후 40  아기 예수님: 아침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당시에 아기 예수님은 몇 살 때쯤인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 후 본문과 관주들을 더 주의하여 읽어가는 중에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하게 하는 날들이 되자” “부모가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에 해답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눅 2:22). 즉 구약시대에 여인은 남자아이를 낳으면 7일 동안 부정하고(레 12:2), (오, 우리가 출생부터 부정한 자(시 51:5)임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추가로 33일 동안 정결케 하는 날들(4절)을 채운 후에, 번제물과 속죄물을 가지고 제사장 앞에 가야 했습니다(6절). 이 계산에 따르면 예수께서 시므온의 팔에 안겼을 때는 아마도 생후 40(7+33)일 정도였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생후 두 달 정도의 아기를 팔에 안았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기가 머리숱이 많고 어쩜 이렇게 까맣냐’든지, ‘엄마 닮아서 피부가 뽀얗다’든지 아니면 ‘눈이 부리부리한 것이 장군감이네’ 정도의 덕담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고” “그 영의 지시”와 “인도”를 받고 있던 시므온은 이 갓난아기를 보면서 참으로 놀랍고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즉 시므온은 사람-구주이신 이 아기 예수님을 1) “이스라엘의 위로, 2) “이스라엘의 영광”, 3) ‘이스라엘에 대한 시험’, 4) ‘이방인들의 ’, 5) “주님의 구원”, 6)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시”로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호칭들에 대하여 며칠을 두고 음미하고 다시 기억해 내어 누리는 과정을 거쳤지만, 어떤 말은 여전히 낯설고 또 어떤 말은 전보다 더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추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누리는 일은 식은 죽 먹는 것처럼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새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주 예수님에게 이런 방면들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도 영적인 생명이 더 자라고 진리 소화 능력이 더 강화되었을 때 다시 꺼내어 누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삼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25), “이스라엘의 영광”(32), ‘이스라엘에 대한 시험’(34)주 예수님께서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 1:3)이시고, “우리를 모든 환난 가운데서 위로해 주시는”(4절) 분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아기 예수가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표현은 제게 다소 낯설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는 위로가 필요한 상태임에도 자신들의 위로자인 분을 배척하는 현 상황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분을 어떻게 상대하든지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이 이 사실을 체험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슥 12:10, 13:6, 계 7:4).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는 말도 솔직히 제게 와닿는 것이 거의 없는 용어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시험”은 그럴 수 있으시겠다 정도의 인식만 있습니다. 오 주님, 당신에 대한 저의 이해력을 넓혀주소서 라는 기도가 깊은 속에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가리켜, 이방인들에게 계시하는 빛이요(A light for revelation to the Gentiles, 32절)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아멘입니다. 한때 알량한 문학 지식과 정의와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를 열망하는 젊은 패기를 가졌다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며 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신성한 빛이 제게 비춘 후에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 눈에는 가치가 없음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여전히 부족하지만 뒤에 있는 것들을 잊고 위로 부르신 그 부름을 따라 그리스도를 붙잡으려고 부단히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참으로 ‘이방인들의 ’이신 그분 덕분입니다. 이 어떠한 구원인지요!

 

주님의 구원: 사실은 시므온이 이 아기 예수를 받아 안고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는데(My eyes have seen Your salvation, 30절)라고 말한 것을 예전에 읽고 난 후에, 제 구원관이 더 투명해짐을 체험했었습니다. 그 후로 구원은 한 인격이고, 구원받았다는 말은 이 인격이 우리 존재 안에 들어오심임을 이해했습니다.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시”: 시므온은 34절에서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 아기는 …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시(a sign spoken against)로 세워지실 것”임을 이야기해 줍니다. 이 말은 누가 사람들의 반대를 받을 때 그가 반드시 틀렸기 때문만은 아님을 알게 해 줍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이 틀린 분이 아님에도 이 땅에서 사역 시 사사건건 트집이 잡히고 반대에 직면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오히려 이러한 반대를 대적하는 쪽의 상황을 폭로하고 더 깊은 진리를 해방하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더하여 그분은 “나 때문에 여러분을 비난하고 …거짓말로 여러분을 반대하여 온갖 악한 말을 할 때에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11-12상). 오, 그렇습니다. 주님이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시이신 것은 이 시간에도 부당하게 반대와 박해를 받는 모든 이들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입니다!

 

 

  예수님당신은 측량할  없는 풍성을 가지셨습니다( 3:8).

하지만 당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너무나 좁고 제한됨을 고백합니다.

 주님가나안 ‘좋은 이신 당신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체험을  넓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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