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52회 - 혼이 정결케 되어야 하는 이유
에세이
청지기 , 2021-10-15 , 조회수 (309) , 추천 (0) , 스크랩 (0)


한 신실한 성경 교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가 가져야 할 성격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은 사역자는 잘 듣는 것을 배우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소위 사역은 주로 말을 하는 것인데, 듣는 것을 잘해야 한다는 지적은 의외였고 신선했습니다. 저자는 말을 잘 들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차분한 사람이 되어” “어지럽지 않은 마음과 고요한 영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야 하고, “한 장의 백지”와 같이 어떤 선입관도 갖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 외에도 더 깊은 언급이 있지만, 이미 위 조건들을 충족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역자들은 늘 여러 일들에 분주하고,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오고 가며, 사람인지라 선입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조언은 성경을 읽을 때도 해당됩니다. 성경 읽기도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 저를 포함한 대부분은 자신의 기존의 생각을 성경 본문에 덧칠해서 받아들입니다(듣습니다). 따라서 읽은 본문에 담긴 사상이 우리의 사고체계를 부수고 들어와야 비로소 성경 읽기가 효력이 있게 된다는 점이 아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깊이 만져졌습니다.

 

여러분이 진리에 순종하여 자기의 혼을 정결하게 함으로써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벧전 1:22).

 

솔직히 첫날 아침에 위 본문을 읽은 후에도,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려고 본문은 물론 여러 참고 자료들과 며칠을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그 결과 ‘혼을 정결하게 함’과 ‘형제를 사랑함’에 대해 아래와 같은 새로운 감상과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혼을 정결하게 함: 예를 들어 소위 페미니즘을 추구하는 한 자매는 다른 말씀은 다 인정해도 “남자는 여자의 머리”(고전 11:3)라는 진리는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말을 무시하는 아내를 둔 어떤 형제는 “남편 여러분 …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엡 5:25)라는 말씀을 읽을 때, 속으로 ‘사랑스러운 아내일 경우에만’이라는 단서를 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위 본문이 말하는 진리에 순종하는 문제는 대개 우리의 혼, 특히 생각 속에서 그 말씀과 갈등하고 대립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모든 말씀은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바른 성경관이 있다면, 그는 말씀과 다른 현재의 자기 관점을 바꾸는 쪽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오류가 있고 사본이 어떻고 하며 성경을 절대 기준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입맛에 맞지 않는 내용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거부할 것입니다. 위 본문은 당연히 전자의 태도를 갖는 것을 전제합니다. 묵상이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 말씀을 자기가 취사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건강하지 않은, 심지어 ‘더러운 생각(혼)’에 해당한다는 빛 비춤이 있었습니다.

 

관련하여 수년 전에 겪은 한 사례가 생각났습니다. 즉 로마서를 읽다가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것이라면,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십시오”(롬 12:18)라는 말씀에서 발목이 잡혀서, 한동안 이 말씀과 씨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어떤 한 지체와 그다지 달콤하지 않은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것이라면’이라는 말씀에서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즉 상대방의 태도를 임의로 바꿀 수는 없지만, 최소한 저라도 그 지체에 대한 다소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을 내려놓았을 때 해방을 맛보았습니다.

 

형제를 사랑: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이를 용서할 뿐 아니라 심지어 양자로 삼아 돌봐 준 어떤 분과 관련됩니다. 이 경우를 누가 위 본문이 말씀하는 사랑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위 본문은 이러한 눈에 띄는 사례 외에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에게 ‘자기의 양을 목양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따라서 형제 사랑은 상호 목양을 염두에 둔 말과 행동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몸의 지체된 이들에게 “어떤 나쁜 말도 입 밖에 내지 않고”, “건축하는데 좋은 말을 필요에 따라 하는 것”도 형제 사랑입니다(엡 4:25, 29). 한편 ‘모든 소유를 다 나누어 주거나’, ‘자기 몸을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고전 13:3). 위 본문의 문맥에 따르면, 형제 사랑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사랑이신 주님께서 진리의 말씀에 굴복되어 정결케 된 우리의 혼을 통해 나타나시고 살아내어 진 모습입니다.

 

저는 이번 묵상을 통해, 빌라델비아(형제 사랑) 교회를 어떻게 실행할지에 대한 힌트를 얻었습니다(계 3:7). 그것은 먼저 지속적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제 혼이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그 결과일 뿐입니다. 이것만으로도 혼이 정결케 되어야 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주님당신의 거룩한 말씀으로 저의 혼을 정결케 하시어

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주님의 신성한 속성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에세이,정결케 된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