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51회 - 이 생각을 품으십시오
에세이
청지기 , 2021-10-08 , 조회수 (354) , 추천 (0) , 스크랩 (0)


이러저러해서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봐 해 봤어?”라고 반문하기로 유명한 어떤 분이 경영했던 한 대기업이 충남 서산지역 간척 공사를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유난히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의 천수만 방조제 공사는 총 9.8km나 되는 물막이 공사 중 양 둑 사이가 약 270m 정도 남았을 때가 최대의 난관이었답니다. 유속이 너무 빨라서 바위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엮어 만든 20톤 가까이 되는 바윗덩이도 던져 넣은 순간 나무토막처럼 순식간에 쓸려내려 갔답니다. 결국, 어떤 분의 반짝 아이디어인 폐유조선을 가져다가 틀어막는 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고, 그 결과 서울 여의도의 33배에 달하는 땅이 새로 생겼습니다.

 

피조된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자들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경륜(창 1:26, 딤전 1:4)을 성취하는 과정에도 난공사 코스가 있습니다. 구속(redemption)과 거듭남은 비교적 쉬울 수 있으나, 거듭난 각 사람을 변화시켜 그 머리 아래 통일되게 하시는 일은 약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큰 진전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그야말로 난공사 구간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 <변화되지 않은 사람의 생각>이 웅크리고 들어 앉아 있습니다. 평소에 이 문제로 무거운 눌림이 있던 중에, 아침에 아래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감상이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을 품으십시오(Let this mind be in you).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빌2:5).

 

성경 본문 이해: 개역 성경은 이 본문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해당 원문은 마음(heart)에 해당하는 ‘카르디아’(2588)가 아니라, 생각(mind)에 해당하는 ‘프흐로네오’(5426)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회복역과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으라”고 원문대로 번역했습니다. 한편 같은 단어가 쓰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롬 12:3),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6) 등에서는 개역 성경도 ‘생각’으로 잘 번역했습니다. 참고로 위 프호로네오와 유사한 단어가 ‘노에마’(3540)인데, 영어로는 ‘thought’(사상)에 해당합니다. 저명한 성경 언어학자인 말빈 R. 빈센트는 고린도후서 3장 14절에 쓰인 이 ‘노에마’(minds)를 설명하면서, “사상은 본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요약하면, ‘마음’(heart)은 생각(mind)보다 더 큰 개념이고(워치만 니는 마음은 사람의 혼(soul)-생각, 감정, 의지-에 양심이 더해진 개념으로 이해함), 생각에서 흘러나온 것이 ‘사상’(thought)입니다. 그런데 위 본문은 특별히 ‘생각’에 초점을 둔 말씀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우리의 혼의 주도적인 부분입니다.

 

이 생각을”(this mind): 그렇다면, 오 주님 여기서 말하는 “이 생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라고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그 후 앞뒤 관련 구절들을 깊이 묵상하면서 제 마음에 자리 잡은 것은 “오직 생각을 낮추어”(in lowliness of mind)(3절)라는 말씀, 즉 ‘낮추어진 생각’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낮추어진 생각’이 있었는데 그 생각을 우리도 품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허하니, … 나에게서 배우십시오”라고 말씀하셨고 자신을 비워 ‘노예의 모습’(the form of slave)을 취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 으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노예(slave, 둘로스, 1401)가 되어야 합니다”(마 20:27)라고 말씀하실 때, 본인은 이미 그것을 몸으로 실행하고 계셨습니다(요 13:4-5).

문제는 타락한 모든 사람은 이미 생각이 높아져 있다는 것입니다(사 2:11-12, 요일 3:10, 고후 10: 4-6). 그 결과,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은근히 자기를 과시하기를 좋아하고, 누가 비난하는 말을 하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낮추어진 생각’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참고로 신약성경 회복역 각주는 ‘이 생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것’은 3절에 있는 ‘여기는 것’과 4절에 있는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노예의 모습을 가지시어 자신을 낮추시고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을 때(빌 2:7-8), 이러한 생각, 이러한 마음이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 안에서 그분과 하나 되어야 한다(빌 1:8). 그리스도를 체험하려면, 우리는 그분의 부드러운 내적 느낌과 생각에서 하나 되는 정도까지 그분과 하나 되어야 한다.

 

“(이 생각을) 품으십시오”: 이 말씀은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생각을 우리가 모두 공유하라고 명령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추구하면서, 아래에서 보듯이 믿는 우리가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라’는 권면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 것에 새롭게 인상 받았습니다.

 

 “형제님들, 이제 내가 … 간청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게 하여,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으로 조율되도록 하십시오”(고전 1:10). “이제 인내와 격려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 서로 같은 생각을 갖게 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한마음 한뜻으로 그리고 한 입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롬 15:5-6). ”서로 같은 것을 생각하고, 교만한 생각을 품지 말고”(롬 12:16)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같은 것을 생각하십시오”(고후 13:11). “여러분은 같은 것을 생각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며,…한 가지 것을 생각하여”(빌 2:2). “내가 유오디아에게 권유하고 순두게에게도 권유합니다. 주님 안에서 같은 것을 생각하십시오”(4:2).

 

사람의 생각을 일치시키는 세상의 방식은 세뇌를 통한 생각의 획일화, 혹은 다수결에 따른 승복제도 정도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갖는 성경적인 길은 모두 자신의 생각을 비우고 대신에 각자가 머리이신 주 예수님의 생각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만이 유일한 머리시고, 한 몸 안에서는 그분의 생각만이 가치 있다는 ‘몸 의식’(Body-consciousness)이 부족하여 너도나도 머리 노릇을 하다 보니, 우리의 변화 안 된 생각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한 새사람을 (우리의 영 안에서) 입었지만,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는 (지금도)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아주 느리고 협소한 범위 내에서….

 

이 아침에 이 단계에서 하나님의 일이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단지 그분의 낮아진 생각만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 전체가 우리의 존재 안에 더 들어오시고 더 자리를 차지하시는 것임을 절감합니다(요 10:10 하, 골 2:19, 엡 3:17).

 

오 주 예수님, 우리 안에서 교만한 옛 존재가 더 비워지고
온유하고 겸허하신 당신의 존재가 더 증가되소서! 주님, 이 한 가지를 간절히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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