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48회 - 섞임
에세이
청지기 , 2021-09-17 , 조회수 (471) , 추천 (0) , 스크랩 (0)


소위 지방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과거에는 못 들어 본 용어를 듣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회복역 성경이 개역 성경과 달리 번역한 부분이 있거나, 필요가 있어 만들어 낸 ‘신조어(新造語)들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복역이 ‘아들의 자격’(sonship)(엡 1:5)으로 번역한 원문은 ‘휘오데시아’(5206)입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이것을 “자기의 아들들”로 번역했습니다(개역 성경은 같은 단어를 다른 곳에서는 ‘양자’(롬 8:15, 23) 혹은 ‘아들의 명분’(갈 4:5)으로 번역함). 이처럼 오래 읽어 왔던 성경과 다를 경우 생소한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한편 지방 교회 측이 만들어 낸 신조어 중에 ‘합병(incorporation, 合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을 “그날”(부활의 날)에는 알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요 14:20). 합병은 이처럼 <피조물인 우리가 포함된 여러 인격체가 서로 안에 존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개별 인격이 여전히 구별된 상태를 유지하는 하나의 통합체를 가리키는 이 합병 개념은 <삼위 간의 상호 내주>(요 14:11), <주님의 >(엡 4:4),  < 예루살렘>(계 21:2) 같은 신약의 핵심 진리 이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어서 “과정을 거친(processed)이라는 말도 예수님의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승천>을 압축해서 묘사한 말입니다. 또한 “완결된”(completed)이란 말은 <주 예수님의 인성이 부활 후에 죽지 않는 인성이 되신 것(부활했던 나사로는 또 죽었지만)>을 가리킵니다(계 1:18). 이런 것들은 ‘삼위일체’처럼 성경적 사실을 압축하여 설명하는 용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단단한 음식”은 성경의 더욱 깊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어린 신자들이 소화하기에는 솔직히 말해서 어려움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누린 ‘섞임’이란 말이 들어 있는 아래 본문도 일반 설교에서는 잘 안 다루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묵상할수록, 마치 딱딱한 독일 빵을 씹는 것처럼 그 맛이 깊게 누려졌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하나님은 몸을 고르게 섞으시어

부족한 지체에게 더욱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고전 12:24).

 

성경 용어 검토개역 성경은 위 구절을 그냥 (몸을) “고르게 하여”라고 번역했고, 회복역은 거기에  ‘섞는다’는 개념을 추가했습니다. 이 원문의 ‘슁케란뉘미’(4786)가 ‘함께’(4862) 와 ‘섞는다’(mix, 2767)의 합성어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영어 성경들은 이 단어를 ‘put together’, ‘composed’, ‘tempered’, ‘united’, ‘ordered together’, ‘arranged together’, ‘mix together’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했는데, 회복역 영어 성경과 은 이것을 ‘blended together’라고 번역했습니다.

 

섞임의 의미: 이 본문 중에 ‘고르게 섞으시어’에 해당하는 회복역 각주는 아래와 같습니다.

 

(섞임은 몸의 지체들이) 서로 조절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서로 다른 모든 지체를 한 몸 안으로 함께 고르게 섞으셨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롬 12:2). 즉, 실지적인 몸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그 영으로 말미암아 타고난 생명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변화될 필요가 있다.

 

아침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많은 열매(밀알)”(요 12:24)인 우리가 외부 힘으로 으깨지고, 밀기울이 걸러지고, 고운 가루에 물(기름)이 더해지고, 반죽이 되고, 고르게 눌려지고, 마침내 뜨거운 불을 거쳐 한 떡으로 구워진 구약의 소제물(레 2:4-5) 혹은 만찬 떡(고전 10:17)을 만드는 과정이 마음속에 그려졌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1) 십자가의 주관적인 방면을 알고(마 16:24), 2)변화를 경험하고(롬 12:2), 3)주님의 몸(엡 4:16)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는 말씀이겠다 싶었습니다.

 

부족한 지체에게 더욱 귀한 것을 주심”: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여름에 먹을 것이 별로 없을 때 어머니가 자주 수제비(뜨더국)를 끓여주셨습니다. 집 울타리에 달린 애호박을 따고, 텃밭에서 캐온 감자를 썰어 넣고,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얇게 뜯어 넣어 만든 뜨거운 수제비를 먹다가 입천장을 덴 적도 있습니다.

 

자주 있던 일이라 하루는 어머니가 밀가루 반죽을 만드시는 과정을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물을 조금만 부어 물기 닿은 부분의 밀가루부터 손으로 꾹꾹 눌러 반죽을 해 나가고, 살짝살짝 물을 더 부어가며 나머지 마른 밀가루에 물기를 적셔가셨습니다. 한꺼번에 물을 부으면 질척거려서 못 쓰고, 물기가 너무 적어도 가루가 남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미 물기에 적셔진 부분도 잔여 가루가 다 한 덩이의 반죽이 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다시 눌려야 했습니다.

 

아침에 위 말씀을 묵상하는데 문득 어릴 때 보았던 위 밀가루 반죽하는 과정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본문의 “아름다운 지체들”은 반죽에서 이미 물기(그 영)가 적셔진 부분이고, “부족한 지체”는 아직 물기(그 영)가 덜 묻힌 밀가루 부분이고, “더욱 귀한 것을 주셨다”(giving more abundant honor)는 물기(그 영)를 더 적셔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교회 생활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는 ‘물기 없는 밀가루 부분’(부족한 지체)이 주님을 잘 누리지 못해서, 즉 그에게 ‘그 영’(the Spirit)의 공급이 부족한 것이 원인입니다.

 

위 본문에 이어지는 25절은 “이것은 몸 안에서 분열이 없이 오히려 지체들이 서로를 동일하게 돌보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돌본다(care)고 할 때 그것은 돌보는 대상에게 ‘물을 더 끼얹어 스며들게 하는 것’ 즉 생명을 더 공급해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요일 5:16, 요 10:10 하). 그런데 이것을 위해서는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 모두 다량의 자기 부인(십자가)이 필요하고, 특히 물을 주는 쪽은 자신이 먼저 생명의 물을 더 풍성히 마시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요 7:37-38).

 

미국에 있는 한 동역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교회들 안에는 한국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고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고운 가루에 기름이 섞여지고 소금과 유향이 그 위에 더해진(그러나 누룩과 꿀은 없는) 소제물, 혹은 한 새 사람(골 3:10-11)을 생각해 보면 <한국> 사람은 참으로 문제입니다. 이처럼 특정 국가의 국민성, 지역감정, 천차만별의 개인적인 기질들이 모두 제해지고,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만 먹고(요 6:57), 그 영을 마셔(고전 12:13), 주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만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위 ‘섞여진’이라는 말에 담긴 부담(burden)임을 만졌습니다.

 

오 주 예수님, 당신이 이미 그 몸의 지체들을 섞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적용하고 체험하도록 우리가 모두 옛사람의 기질에서 벗어나고, 

그 영으로 더 적셔지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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