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47회 - 화목제물
에세이
청지기 , 2021-09-10 , 조회수 (276) , 추천 (0) , 스크랩 (0)


저를 포함해서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한 사람들이 쉽게 빠져드는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년 동안 반복해서 들어 온 터라 귀에는 익숙한 어떤 성경 용어들을 본인이 참으로 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말로 된 그 용어의 사전적인 정의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인 의미도 참으로 이해했는지는 의문입니다. 또한, 어떤 용어를 ‘이해했어도  말씀을 ‘체험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즉 메뉴를 이해한 것이 그 음식을 먹은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성경 진리에 대한 참된 이해 혹은 체험은 없이 설익은 성경 지식만 머릿속에 쌓여가는 것은 자기 기만 내지는 영적인 교만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교만과 소화되지 못한 성경 지식이 주님을 참되게 만나는데 장애가 된다는 것입니다(고후 3:15-16, 18).

 

이러한 맹점을 알게 된 어느 날 이후로, 저의 말씀을 대하는 방식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즉 그 주 혹은 그 날 주어진 핵심 성경 본문을 먼저 서너 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은 후에, 그 용어를 이해하고 삶 속에 적용하는 길을 알 때까지 주님 앞에 계속 가져가곤 했습니다. 화목제물을 언급한 아래 말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일 그가 바치는 제물이 화목제물이고,

… 흠 없는 것을 여호와 앞에 바쳐야 한다(레 3:1).

 

위 말씀을 여러 번 읽었지만, 처음에는 화목제물이라는 한 단어만 제 안에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화목제물을 언급한 레위기 3장과 7장 본문을 추가로 읽고 이에 대한 이해를 높여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속에서는 관련된 추가 항목들보다도 ‘화목제물’이라는 말 자체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 결과 오 주님, 화목제물은 무엇이며, 우리가 현재 이것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지요? 오 주 예수님, 빛 비춰 주옵소서! 라는 간절한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적대감을 해소하는 제물: 몇 가지 도움이 되는 자료와 묵상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죄 문제를 다루는 속죄제물 혹은 속건제물과 달리, 화목제물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수 관계 혹은 적대감을 해소하는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도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롬 5:10)이라고 하여 죄인이 아니라 <원수>(being enemies)와 <화목>(were reconciled)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튜브를 검색해 보면,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죄들과 의(義)를 말하는 로마서 3장 25절에 근거하여 화목 제물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 본문에 쓰인 “속죄소”(히 9:5, a mercy seat)에 해당하는 ‘힐라스테리온’(2435)을, 개역 성경이 ‘화목제물’(힐라스모스, 2434)로 오역한 것에 따른 정확하지 않은 성경 인용입니다. 개역 성경의 이 부분의 오역 문제는 장로교 고신 교단의 변종길 교수님도 잘 지적한 바 있습니다(신약신학 저널 창간호(2000년 여름), 서울:이레 서원, 2000, pp 57-76 참조). 물론 우리 주님은 화목 제물이시기도 합니다(요일 2:2, 4:10). 그러나 ‘화해 장소-구약의 시은좌’와 ‘화목제물’은 다른 개념입니다.)

 

또한 인류 안에 현재 만연한 이 상호 적대감(enmity) 혹은 증오심(hatred)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묵상할 때 하나님을 거스린 사탄의 배역이 그 뿌리임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성경은 “가라지를 심은 원수 마귀”(마 13:39), “육신의 생각”(롬 8:7), “세상과 친구가 ”(약 4:4)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고 말씀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화목제물은 이러한 하나님과 사람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긴장 혹은 적대 관계를 해소합니다.

 

 단계를 거쳐 적용됨: 즉 이러한 적대감은 구약의 화목제물의 실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 단번에 해소하셨습니다. 다음 두 곳의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 적대감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뜨리셨으며,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이 둘을 그분 자신 안에서  새사람으로 창조하시어 화평을 이루시려는 것이며”(엡 2:14-15)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어,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들에 있는 것들을 그분을 통해 그분 자신과 화목하게 하는 것을 … 여러분도 전에는 … 생각 안에서 그분과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께서 그분의 … 죽음을 통하여 여러분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골 1:20-22).

 

그러나 이러한 성취된 사실(fact)은 고린도후서 5장에 따르면 두 단계로 적용되고 체험됩니다. 즉 먼저는 죄인들이 에서 나오게 하는 화목의 단계(19절), 그리고 그 후에 믿는 이들이 타고난 생명 즉 육체에서 나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단계입니다(20절). 이러한 이유로 사도 바울은 이미 1차로 화목하게 된 거듭난 믿는 이들에게도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라고 거듭해서 간청한 것입니다.

 

이러한 화목의 과정의 절정은 믿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21절). 화목제물에 대한 저의 이해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구약 레위기 3장의 화목제물을 강해 하면서 그것을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과 연관 지은 한 성경 교사의 아래와 같은 설명이 놀랍게 여겨졌습니다.

 

     “제물들에 관한 레위기의 모든 말씀은 작은 장막, 곧 회막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광야에서, 많은 일들로 분주한 수많은 백성들로부터 떠나서, 우주를 창조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작은 장막 안으로 들어오셨다. 삼일 하나님이 그곳에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영원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작은 회막은 점차적으로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함께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관한 이 말씀의 모든 방면은 새 예루살렘에서 성취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요제, 거제임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제물들은 결국  예루살렘을 가져올 것이다.”(레위기 라이프 스타디, # 17).

 

요약하면, 화목제물을 체험하는 것은 화평의 하나님(롬 15:33, 16:20, 빌 4:9, 살전 5:23, 히 13:20)의 거룩한 본성과 불일치하는 우리 안팎의 모든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이러한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누릴 때, 머리이신 주님 혹은 몸 안의 지체들과 어떤 이유로든 불화하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님을 깊이 느낍니다(마 5:23-26). 또한 가짜 평안(망상) 혹은 일시적인 평안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지만(살전 5:3),  참된 평안은 평안 자체이신 그분 안에만 있다는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요 16:33 상).

 

 

  예수님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은 늘어만 갑니다.

화목 제물의 실재이신 당신이  사람 가정 지역 교회
 나라 안에 충만하심으로 당신이 기뻐하시는,

만물을 당신과 화목하게 하신  실재를  땅에서 속히 얻으소서
주님 반드시 그리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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