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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05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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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찬송대회, 연주회(콘서트) 과연 성경적인 것인가?}
신자들은 찬송을 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 향해서 올리는 거룩한 행위이다.
찬송은 그 대상이 유일하게 하나님께 향해야한다. 이러한 원리가 무너진 것은 사람들의 문화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찬송의 대상은 사람이 될 수 없다(그러므로 관중에게 향하는 연주회는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찬송을 받으시며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찬송은 누구나 하는 것이며 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서 실력 있는 자가 특별히 연주회를 만들어서 찬송이나 성가를 부르는 행위는 비 성경적인 것이다. 심지어 회비나 티겟 등으로 공연비를 받는 지극히 비 성경적인 것들이 한국교회 안에 공공연히 행하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찬송의 대상이 유일한 하나님인데 하나님께 찬송을 하는 자들이 자신의 곡을 듣는 자들로 돈을 받고 판매하는 행위는 중세시대에 면죄부를 비판한 개신교라는 것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과 은혜라는 기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 돈을 버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용어들이 들어간다면 이는 돈으로 관계된 것이 아닌 믿음으로 관계되며 신앙으로 나타나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장사행위는 극에 달해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 앞에서 무대를 만들고 자신들의 재능을 나타내는 모습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무대중심 문화가 아닌 공동체적인 모습이 성경적)
기독교적인 용어는 연주회가 아니라 찬송이며 찬미이다. 또는 찬양이다. 결국 신앙으로 드리는 찬송가들은 세상의 문화와 합할 수 없으며 그 이유는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과의 관계로 찬송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곡들까지도(찬송) 세속적인 용어로 바꾸고 세속적인 방법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중들이 있고 그 앞에서 찬송하는 자들은 자신의 음악적인 예술을 뽐내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이러한 비 성경적인 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하나님이 아닌 음악 하는 자들이 차지하고 그들의 실력을 나타내는 것이 어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러한 행사는 연주회, 대회, 콘서트 등 비 신앙적인 용어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차라리 복음 송 집회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찬송대회는 얼마나 성경과 멀리 떨어진 문화로 우리가 살고 있는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의 대표적 사례이다. 찬송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것이며 이는 대회가 되어서 실력을 나누는 행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 찬송대회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 찬송대회와 같은 모습을 기뻐하실 것인가? 인간의 대회가 아닌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라는 것이다. 찬송이 대회가 될 수 없다는 명백한 근거는 성경에서 성도의 찬송은 우리의 대회와 같은 행사가 아닌 위로 올려드리는 자녀들의 곡조 있는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마음으로 감사하고 입술로 찬미한다는 것이다.
찬송은 드리는 그 시간에 하나님이 직접 받으신다는 것이며 주인공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성령이 그 안에 계셔서 우리의 찬송을 하나님께 올리신다. 마치 인간이 찬송하고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대회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찬송하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현장에서의 영적인 교통이다.
이러한 교통 가운데 사람들의 감사의 찬송을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에 직접 하늘에서 받으신다는 것이다. 찬송은 사람이 마음으로 드리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가 찬송의 시간을 정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간에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어서 우리의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물론 직접적인 찬송이 있는가 하면 간접적인 복음송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구분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찬송과 우리의 신앙의 노래와 전도용 등이 구분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문제이다. 찬송의 실종은 인간 중심에서 나타난 것이며 예배가 아닌 집회 등으로만 나타난 것과 무관하지 않는 것이다. 드리는 행위보다 받는 은혜중심이 된 것이다.(흔히 은혜 받으러갑시다 는 용어가 의미하듯이 우리중심의 신앙)
찬송도 사실 곡조 있는 기도와 같다는 것은 찬송을 할 때에 하나님이 그때그때 받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이와 같이 찬송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도 없다.
기도도 우리 마음의 소원으로 역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로 올라가는 영적인 것들은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영적인 교통이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대회나 행사가 중심되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행사가 아닌 하나님과 성도가 직접 관계되는 신앙의 행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행위 속에는 돈이 조건으로 거래가 될 수가 없다. 또 찬송과 예배 중에 인간이 높임을 받은 박수나 사람들의 높이는 행위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높임을 받는 오늘날의 기독교 연주회는 대단히 잘못된 신앙의 행위로 변질시키고 만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그 곳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찬송을 하늘에서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주회와 같이 개인이나 그룹이 주인공이 아닌 하나님이 유일한 주인공이 되시면서 그 공동체 전체가 성령으로 나아가는 찬송과 기도가 본래 합당한 것이다. 개인의 연주회나 집단의 연주회가 절대로 기독교적인 공동체의 신앙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찬송이라는 말 앞에 대회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찬송이 예배의 한 요소라는 것이다. 예배의 요소인 찬송은 대회가 될 수 없다. 예배의 요소인 찬송을 하면서 돈을 요구하는 이상한 일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연주회) 예배를 우리가 드리면서 예배의 대가로 돈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인 기도나 찬송을 돈으로 바꾸어서 계산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것이다.
찬송이나 기도는 돈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은혜의 선물로 미리 허락한 것이다. 성도들이 은혜의 수단으로 은혜를 얻어서 스스로 원해서 드리는 것은 진정한 헌금이 된다. 그러나 예배가 있으니 또는 말씀이 있으니 헌금을 준비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돈으로 미리 예배와 말씀을 계산해서 준비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돈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측정하고 계산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흔히 부흥강사들이 예배시간 시간에 헌금을 준비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율법적인 것이다. 본인이 스스로 원해서 은혜가 되는 대로 드리는 것이 참 원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며 우리의 감사는 감사이다. 기도나 찬송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이지만 미리 기도를 목사님께 받기 전에 기도의 대가를 요구하거나 말씀을 주시기 전에 헌금을 요구하는 것은 아직 은혜도 받지 않았는데(은혜의 행위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앞으로 받을 은혜를 위해서 담보로 헌금을 드려야 된다는 거짓이론과 같다.
기도의 응답을 위해서 헌금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같다. 이러한 일이 공공연히 일어나는 것은 은혜가 거저 주는 선물이 아닌 공로로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위나 표현으로 은혜가 온다고 생각하기에 미리 헌금을 준비하게 하거나 강조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이방인들의 종교와 같이 나타난 기복신앙의 기초이다. 은혜는 헌금을 준비하기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다. 기도도 우리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찬송도 누구나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며 예배도 누구나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한 은혜이다.
우리의 대가나 요구로 예배가 예배되고 찬송이 찬송되고 기도가 기도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은혜로 주어진 예배자이며 찬송자이며 그리고 언제나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성도이다. 돈으로 주어진 은혜가 아닌 선물과 같이 주어진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이다.(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것)
그러므로 언제든지 헌금은 자신의 마음이 원해서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드릴 수 있는 헌금도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이다. 성도는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자격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요구나 강요가 아니라 언제든지 믿음으로 자신이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성도의 당연한 자격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요구나 사람의 강요로 드리고 바치고 행하는 것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요구하신다면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요구하실 것이다.
예배하는 드릴 수 있는 자들에게, 기도할 수 있는 성도들에게, 헌금을 드릴 수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요구는 성령으로 예배드리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감사로 드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사람의 요구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요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이 없는 예배와 찬송과 기도와 헌금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마음으로 드리는 진실한 헌금을 성도들에게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를 잘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의 요구대신 사람의 요구는 은혜를 돈으로 계산하려는 것이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다. 성령으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도 사람의 요구가 아닌 것이며 하나님이 요구하는 예배이다.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헌금도 하나님이 받으신다. 역시 하나님이 원하는 헌금이 무엇인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찬송도 하나님이 받으신다. 역시 하나님이 원하는 찬송이 무엇인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건적인 순종이 아닌 자발적인 순종이 있어야 한다. 마음을 원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배가 복 받는 행위적인 공로가(조건적) 아닌 참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요구하신다. 즉 순종을 요구한다. 헌금이 은혜를 받는 조건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로 드리는 감사헌금이 되길 요구하신다. 우리는 순종의 대상이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절대적인 대상이다.
이러한 관계가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헌금과 찬송과 그리고 예배 등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목사가 예배를 교인에게 잘 드리라고 직접 말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배를 잘 드리라고 먼저 요구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진실로 드려라 또는 헌금을 하나님께 진정으로 드려라 등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 지도자들의 자세이다.
예배나 기도나 찬송 등은 먼저 수직적인 관계이며 수평적인 관계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수직적인 관계가 먼저 이루어지면서 수평적인 교제가 자연히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글들은 기독교 신문들 안에서 자유게시판에 게재되었습니다. =김인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