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46회 - 초대교회가 실행했던 네 가지
에세이
청지기 , 2021-09-03 , 조회수 (385) , 추천 (0) , 스크랩 (0)


저를 포함해서 적지 않은 분들이 초대교회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환상과 기대가 있습니다. 즉, 현재 주변에서 보는 교회들의 모습이 조금은 실망스럽지만, 적어도 초대교회 때는 안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초기 교회생활을 묘사한 구절들에는 격려가 될 만한 것들이 제법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는 이들이 함께 살면서 개인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에 따라 나눈다거나, 한마음 한뜻으로 자주 모이고, 음식도 함께 나눠 먹고,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변 사람들 눈에 좋게 보임으로써 구원받는 이들의 숫자가 나날이 늘어난 것 등입니다(행 2:44-47). 그러나 이런 밖에 드러난 모습들의 이면에는 아래 말씀과 같은 실행들이 있었다는 점이 아침에 묵상하면서 깊이 만져졌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 안에 꾸준히 머물며,

떡을 떼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꾸준히 계속하였다(행 2:42).

 

많은 때 사람들은 잔잔한 호수 위를 평화로이 떠다니는 오리 떼의 모습만을 볼뿐, 그 수면 아래에 부지런히 움직이는 발이 있음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며 공동체 생활을 포함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지만, 결과는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교회는 단지 부름 받아 나온 한 무리(에클레시아)만이 아니라 더 깊은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혹은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으로 정의합니다(엡 1:23). 그런데 모든 거듭난 이들로 이루어진 이 몸은 실제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처럼 각 지에 나타납니다(행 8:1). 따라서 각 지역교회는 한 몸의 일부로서 이방인들 앞에서 그 몸의 특성을 살아 표현해야 할 책임이 있고, 다른 지역 교회들과도 유기적인 연결이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몸의 하나의 간증을 지녀야 합니다(엡 4:4). 아래 내용은 교회에 대한 이러한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위 본문에 있는 네 가지 항목을 묵상한 결과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메시아로 이 땅에 보내어지신 분입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후에,  “내가 여러분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십시오”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마 28:20). 이처럼 사도들의 가르침은 주님께서 당부하신 그 내용을 동일하게 가르친 것이므로, 성경에는 여러 사도들이 있었지만 위 본문은 그들의 가르침을 단수로 표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르침은 무엇인지를 묵상하던 중에,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신 몇 구절들이 떠올랐습니다. 먼저 1) 그분은 자기 백성을 죄들에서 구원하시고(마 1:21), 2)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며(요 10:10), 3) “내 교회를 건축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6:18).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목적을 이루셨고 또 지금도 이루고 계십니다.

 

조금 더 추가하자면,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죄들의 용서만 아니라 우리의 옛사람을 포함하여 그리스도 아닌 모든 것을 끝내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부활하신 후에 생명 주는 영으로서 피조물인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시고, 이 생명을 더 풍성히 주실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 결과는 그분의 충만인 그분의 몸, 즉 교회의 건축입니다(롬 6:6, 고전 15:45, 골 3:4, 1:28).

 

실제로 위 본문 바로 앞에서 베드로가 전파한 핵심은 나사렛 사람 예수님 자신(행 2:22)과 그분의 죽음(23절)과 부활(승천을 포함한)(31절)인데, 이 세 가지가 사도들이 공유했던 사도들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 안에서 이 죽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 외의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분열이 생기고, 이 세 가지 이외의 것을 몸 안에 가져오면 그것이 바로 ‘다른 가르침’입니다(고전 2:2, 빌 3:10).

 

(사도들의) 교통: 여기서의 교통(코이노니아)은 위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나온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즉 사도들이 가르친 주님 자신과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추구하고 누린 결과로 우리 안에서 영이신 주님이 흐르시는 것이 교통입니다(계 22:1). 이것은 마치 우리 몸 안에서 피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요일 1:3).

 

떡을 떼는 것: 이 주님의 만찬은 떡이 하나이듯이 우주 가운데 몸도 하나뿐임을 상기시켜서 분열을 그치게 합니다(고전 10:17). 또한 그분의 죽음을 깊이 감상하고 선포하게 합니다. 또한 성경은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만찬을 실행하지 않을 경우 엄중한 징계가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고전 11:27-32).

 

기도하는 것: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엄밀히 말해서 주님의 뜻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시는 주님과 동역하는 기도를 암시합니다. 주님은 그분의 뜻에 따라 구하면 응답하십니다(요일 5:14).

 

여기까지 묵상하고 추구했을 때 제 안에도 소위 말하는 초심에서 멀어진 부분이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잡다한 성경 지식이나 잠깐 있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들에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사도 바울처럼 ‘입방체이신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더 알고 체험하는 일에 남은 일생을 전적으로 쏟아붓고 싶어졌습니다(엡 3:18, 빌 3:10).

 

 

 

오 주님,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 안에 머물고,

떡을 뗌과 기도하는 일에 자신을 더 헌신하기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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