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회적으로 ‘공정’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뜨겁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이 주제에 대해 민감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에는 완벽하게 공정한 사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목표를 향해 다가가는 노력을 할 뿐입니다.
이 점은 가정에서도 동일합니다.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 자식을 공평하게 대하려는 부모들의 속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모도 사람인지라, 첫정이 든 맏이나 연약한 막내에게 마음이 더 끌릴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좀 시간이 지난 통계이지만, 미국의 타임지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부모는 한 자녀를 편애하고 있으며 이는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미국의 UC 데이비스 연구진이 768명의 형제자매와 그들의 부모를 조사한 결과, 아버지의 70%와 어머니의 65%가 한 자녀를 편애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그 근거입니다. 이러한 부모들의 편애는 자식들 사이에 시기와 질투가 생기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누린 아래 말씀은 저에게 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을 묵상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몸 안에서 분열이 없이
오히려 지체들이 서로를 동일하게 돌보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고전 12:25).
위 말씀은 낯설지 않은 내용인데, 다시 읽을 때 ‘서로를 동일하게 돌본다’는 부분이 새롭게 제 마음을 만졌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분의 일꾼들을 통해 (몸인) 교회를 건축하고 계시고(마 16:18), 이 교회 건축에는 분열 없는 하나가 무엇보다 중요한데(요 17:21-23), 우리의 돌봄의 차이가 몸 안에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니요! 참고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의 바울, 아볼로, 게바, 심지어 그리스도를 선호하는 각각의 사람들을 엄중하게 책망했고, 빌립보 교회에게는 ‘같은 사랑을 가지라’고 권했습니다(고전 1:11-12, 빌 2:2).
솔직히 그 몸의 지체들 중에는 더 잘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거리를 두고 싶은 대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 안에도 끼리끼리 어울리는 작은 동그라미들이 생겨납니다. 이처럼 관심하고 돌보는 정도에 차이가 생기고 그 범위가 점차 커지다 보면, 부득이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갈라서기도 합니다. 현재 교계 안에 있는 분파가 그런 결과들입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위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을 돌아볼 때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기에, 인간적으로 호감이 가거나 뭔가 껄끄러운 느낌을 주는 지체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이런 상태가 틀렸고,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반드시 몸의 하나는 지켜져야 하고 분열은 피해야 한다는 강한 부담이 제 안에 있습니다. 그동안의 교회생활에서 체험하고 또 배운 결과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10여 년 전에 하나뿐인 딸이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다른 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전까지 부모(특히 엄마)와 딸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와 요구와 불만 혹은 자랑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소위 빈 둥지 증후군을 포함한 여러 환경을 거치게 하시면서, 딸이나 저희 부부나 옛사람으로서의
인간적인 관계를 깊은 속에서부터 철저히 끝내게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비록 부모 자식 관계는 남아 있지만, 딸이나 저희나 만나서 대화하거나 전화 통화할 때 몸 안의 귀한 지체로 대하고 서로 안의 그리스도를 감상할 뿐, 육신 안에서 나온 선호나 기대나 요구는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은 사람들을 대하는 저의 마음을 전보다 더 넓혀주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우리의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마 5:44-46). 우리는 우리를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 … 우리는 절대로 진리는 양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보편적인 사랑을 실행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보편적인 사랑, 주 예수를 사랑하고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며, 반대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는 그 사랑이 필요하다. 반대자들은 사랑할 수 있는 인간 존재임을 유념해야 한다”(WL, 캠퍼스 복음전파, 47, 50쪽).
끝으로, 오래전에 주님 섬기는 것을 배우던 어떤 과정이 끝나고, 졸업식 축사에서 들었던 다음과 같은 말이 지금도 제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각지 교회에 돌아가면 절대로 분열을 일으키지 말고, 어떤 경우에도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지도 말라.”
물론 위와 같은 말씀을 따라 지체들에게 ‘동일한 돌봄’(have the same care for one another)을 실행하고자 해도 실패할 때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때마다 지체들은 말씀과 권면으로 저를 잡아 줄 것이고, 저는 그러한 권면을 기꺼이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묵상을 통해 저의 ‘동일한 돌봄’의 차이로 분열의 씨앗이 심겨지는 일은 거짓말이나 도둑질 그 이상으로 제 양심을 괴롭히는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몸의 머리로서 그분에겐 “열 손가락 모두”가 귀하고, 어느 하나도 결코 버릴 수 없으십니다(고전 12: 12-27).
오 주님, 몸 안에 분열이 없도록 지체들을 고르게 섞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로 당신이 핏값 주시고 사온 지체들을
어떤 선호도 없이 동일하게 돌보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