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도 자신들은 비록 예수를 안 믿지만 기독교인은 최소한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기대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기준에 못 미치는 신자들을 볼 때, 실망하거나 비난합니다. 그럴 때 기독교인들의 방어 논리 중의 하나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고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연장에서, 누가 믿음만 아니라 믿음의 행위 혹은 삶의 열매도 필요하다고 말하면 ‘행위 구원론자’로 내몰리곤 합니다.
이런 공방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개혁파 교회가 ‘오직 믿음’을 강조한 것은 로마 천주교의 ‘공로 구원’의 반작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땅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될 때 행위를 중시하는 유교의 가르침(예를 들어, 無惻隱之心 非人也’(맹자의 공손추 편)-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이 ‘이신칭의’가 필요 이상으로 더 강조되었습니다(정훈택, 신학 지남 229호, 1991, 57-88쪽). 그러나 사실 성경의 가르침은 유교보다 훨씬 뛰어나며, 제대로 믿는 사람은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의 삶을 살아야 정상입니다(마 5-7장). 비록 전보다 흑암은 더 깊어졌고, 교회의 간증은 하락했어도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본(휘포그람모스, 5261)을 따라야 할 믿는 이들의 삶의 표준마저 경시할 필요는 없습니다(벧전 2:21, 마 5:48).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과 소금이 더해진 ‘소제물’(meal offering)(레 2:4)의 실재이신 주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 이 땅에 사실 때 위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의 실재를 사셨습니다. 아침에 아래 말씀을 묵상할 때 그러한 주님의 높고 아름다운 인격이 제 안에 깊이 만져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마침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데,
죽은 이는 외아들이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그 동네의 많은 사람이 과부와 함께 뒤따르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울지 마십시오”.라고 하시고는(눅 7:12-13).
‘불쌍히 여기시어’의 의미: 위 말씀에서 사용된 ‘불쌍히 여기다’(스플랑크니조, 4697)는 ‘속부분’(the inward part) 즉 ‘마음, 간장, 허파 등’을 가리키는 ‘스플랑크논’(4698)에서 유래했습니다. 참고로 신약 성경 회복역 관련 각주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례는 과부의 외아들이 관에 실려 나오는 다시없는 비통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구주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또한 다시없는 애정 어린 동정심으로 가득하셨다. 주님은 요청을 받지 않으셨지만, 부드러운 긍휼로 부활 능력을 사용하시어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던 것이다. 이것은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원하시러 오신(눅 19:10) 그분의 유일한 위임을 나타내며,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사람-구주의 높은 도덕성의 표준을 보여 준다.
신성한 속성을 인간 미덕을 통해 살고 표현하심: 어떤 이는 위 사례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15절) 기적에 주된 관심을 둘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러한 기적의 원인이자 동기인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향한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침에 깊이 누렸습니다. 그분은 이러한 기적을 통해 능력을 과시하려거나, 자신의 복음 사역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대신에 그분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늘 아버지의 ‘신성한 속성들’(divine attributes)을 자신의 ‘인간 미덕’(human virtues)을 통해 살아내셨습니다. 그 결과 지켜본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라고 반응했습니다(16절).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의 다른 사례들을 더 찾아 추구해 볼 때 이 점이 더 확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즉 아래의 몇 가지 사례들은 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시려고 이적과 기적들을 베푸신 기록이지만 그 첫 출발점은 주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이었습니다.
1) 사복음서 모두가 기록하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많은 이들이 익히 들어 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왜 그런 기적을 베푸셨는지에 대해 다음 구절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무리가 나와 함께 머문 지 이미 삼 일이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불쌍합니다. 내가 그들을 굶긴 채로 집으로 돌려보낸다면, 길에서 쓰러질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막 8:2-3). 오 이 어떠한 인격이신지요!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같은 상황을 놓고 “이곳은 외딴곳이고, 때도 이미 늦었으니, 무리를 보내시어 그들이 마을에 들어가 음식을 사 먹게 하십시오”(마 14:15)라고 반응한 제자들의 모습과 너무 대조됩니다.
2)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손을 내미시어 그에게 대시고 “내가 원하니 깨끗하게 되십시오!”라고 하시자, 즉시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고 깨끗하게 되었다”(막 1:40-42).
3)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왕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온갖 질병과 모든 아픔을 고쳐주셨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며 내버려졌기 때문이다”(마 9:35-36).
4) “눈먼 두 사람이… 외쳐 말하였다. … “주님,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그들이 즉시 보게 되어 예수님을 따랐다”(마 20:30-34).
우리도 그 인격을 살아 냄: 위와 같은 주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드러난 모습만 본다면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과 유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본질은 전혀 다릅니다. 즉 그들이 말하는 ‘측은지심’은 타락한 옛사람의 마음을 최대한 훈련한 것이라면, 주 예수님은 돌아온 탕자를 보시고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입을 맞추시는”(눅 15:20) 그 성부 하나님의 인격을 자신의 인성을 통해 살아 나타내신 것입니다(요 6:57 상). 이것이 사람의 교훈(윤리 도덕)과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사는 사람을 얻으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 사는 동안, 부활 후에 생명 주는 영으로서 우리 영 안에 들어오신 주 예수님의 인격을 다시 사는 것입니다. 즉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그 장본인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삶을 반복해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이런 실재가 있다면, 그는 훗날 천년 왕국에도 넉넉히 들어갈 것입니다(마 7:21, 갈 5:19-21 ).
오 주 예수님, 우리는 악한 사람은 물론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주님을 먹음으로, 신성한 속성들을 인간 미덕을 통해 표현하셨던
당신의 그 인격을 늘 살게 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