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41회 - 나를 먹는 그 사람(2)
에세이
청지기 , 2021-07-30 , 조회수 (271) , 추천 (0) , 스크랩 (0)


이 글을 쓰면서 50대 초반의 한 자매님이 생각났습니다. 그 부부는 오래전인 처녀와 총각 때부터 교회 안에서 지켜보아 온 사이라 서로 편하게 대화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최근 들어 안 아픈 곳이 거의 없고, 특히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아프답니다. 말끝에 “처녀 때부터 잘 안 먹고 몸을  돌보았더니 나이 들어 이렇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제 아내도 처녀 때부터 늘 붓는 편도선 때문에 항생제를 달고 살아서, 체격은 있지만 몸이 워낙 약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님의 긍휼로 이런저런 도움을 통해 많이 건강해졌습니다. 주말이 되면 피곤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쓰러지다시피 했던 사람이 지금은 주중에 몸을 쓰는 일을 하는데도 주말에도 끄떡없습니다. 다행히 늦게라도 몸을 돌본 결과입니다. 사실은 저도 어릴 적에 자주 아팠습니다. 아프면 입맛도 없어져서 밥을 못 먹으면, 어머니가 “아파도 먹어야 기운 차린다. 입맛 없으면 물에 말아서라도 먹어라”고 하셨던 것이 떠 오릅니다.

 

이 먹는 문제를 놓고 깊이 묵상할 때, 육신은 물론 심지어 영적으로도 <먹는 것과 몸을 돌보는 일>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음을 보았습니다. 지난 글에 이어서, 관련 내용을 아래에서 계속 적어보겠습니다.

 

-나를 (먹는): 해당 본문에서 주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신 ’(eats Me)를 먹으라고 하십니다(요 6:48, 57). 이 부분을 실행하려고 주님 앞에서 그분을 앙망할 때 최소한 세 가지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말씀을 통해 그분의 인격(생명)이 우리 안에 더해졌는지 아니면 성경 지식이 조금 더 증가하거나 삶의 교훈만을 더 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는데 …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심으로(요 5:39-40), 성경 연구와 생명 얻는 것은 별개일 수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성경 지식과 교훈은 좋은 것이지만, 생명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 때 합당한 기관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예를 들어, 밥은 입으로 먹지 코로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공부할 때 생각을 사용해 온 습관 때문에, 하나님의 내쉬신 ‘호흡’(딤후 3:16)이자 영의 ‘음식’(마 4:4, 렘 15:16, 벧전 2:2)인 성경을 대할 때도 생각으로 읽고 이해하려고만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차려진 음식의 영양가와 열량만 열심히 계산하다가 먹지도 않고 일어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음식(성경)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은 많은데, 그 음식을 먹어보았더니 조금 짰다든지 싱겁다는 등의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는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결과 적지 않은 이들이 모두 깊은 곳에서 허기를 느끼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것은 몰라도 남을 위해 대신 먹어주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비결 중 하나는 우리의 거듭난 영을 사용하여 말씀을 기도함으로 먹는 것인데, 이 역시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하는 것처럼 어색하고 많은 훈련이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솔직히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지를 놓고 저 역시 씨름하고 있습니다. 깊은 속에서 오 주 예수님, 우리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사, 당신을 생명으로 먹는 것을 바로 배우고 실행하게 하여 주소서! 라는 탄식의 기도가 있습니다.

 

둘째, 나를 먹으라는 말씀은 꼭 <쓰여진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라는 말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영접했던 부활하신 그리스도, 즉 지금 우리 영 안에 내주하시는 생명 주는 (고전 15:45)을 ‘먹는’ 방면도 있습니다. 성경적 표현대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듭난 영뿐 아니라) “마음 안에도 거처를 가지시도록“ “믿는”(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 1:12, 엡 3:17). 이것 역시 우리의 혼(생각, 감정, 의지)이 고집을 부리고 뻗대고 있기에 ‘자기 부인’이라는 장애를 넘어서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셋째, 나름 필요하거나 입에 당겨서 먹었지만, 먹은 음식이 몸에 진짜 좋을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어떤 이는 방언이 성경에 있다고 해서 방언을 지나치게 ‘먹다가’ 오히려 주님의 몸에 혼잡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이 ‘찬송시’, ‘가르침’, ‘계시’, ‘방언’(다른 언어), ‘통역’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데, “모든 것을 (몸의건축을 위하여 하십시오”라고 반복해서 권면합니다(고전 14:26, 10:23, 고후 12:19, 13:10).

 

누가 항산화제인 비타민 C를 먹고 몸이(특히 위장병) 좋아졌다고 해서, 저도 한동안  밥 먹고 두 알씩 하루 6천CC씩 꼬박꼬박 챙겨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위가 쓰린 병이 생겼습니다. 그 후 한의사에게 갔더니, 비타민 C가 목체질에는 좋은데, 저 같은 금체질에겐 독이랍니다. 이처럼 성경 말씀도 주님의 몸의 건축을 위해 먹어야 합니다그러나 이런 공과는 주님의 몸을  알고, 그 몸을 관심해야 배울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의 양식인 말씀도, 1) 기도로, 즉 사람의 영을 사용하여 먹고, 2) 자기 부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의 혼 안으로도 들어오시도록 먹고, 3) 에 유익이 되고 그 몸이 건축(building up)되도록 먹어야 제대로 먹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것입니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밥 먹고, 밥심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유기적인 개념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던 그 주님을 먹고, 우리도 그분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벧전 2:21). 사복음서에는 인자(人者) 즉 사람의 아들로서 이 땅에 사셨던 기록이 가득합니다. 그중에서 제 안에 깊은 울림을 준 다음 두 구절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요 14:10). 주님께서 지상 사역 시 하셨던 그 수 많은 말씀은 자기 말이 아니고 내주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분도 자기 말을 할 줄 아십니다(막 14:36).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없습니다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므로 나의 심판은 공정합니다왜냐하면 내가 나의 뜻을 구하지 않고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구하기 때문입니다(요 5:30). 주님은 늘 자기 뜻을 접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완성하는 것을 “자기 음식”으로 먹고 사셨습니다(요 4:34).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는 멍에를 평생 짊어지시고, 기꺼이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 마음대로 말할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시고, 아버지의 뜻과 말씀과 일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 사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아버지를 표현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요 17:4). 오, 우리도 잘 먹어서 이런 삶을 살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요한복음 6 57절은 너무나 깊습니다
우리가 모두  말씀을 바로 알고 체험하게 도우소서!

에세이,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