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40회 - 나를 먹는 그 사람(1)
에세이
청지기 , 2021-07-23 , 조회수 (576) , 추천 (0) , 스크랩 (0)


이 몇 년 사이에 육신의 양식을 먹는 습관에 두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먼저는 몸에 필요한 것을 먹어주는 방면입니다. 예전에는 먹는 것에 별 신경을 안 썼습니다. 하는 것 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아침은 거르거나 대강 때우고, 점심도 무엇을 하다 보면 한 두시나 되어야 먹곤 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밥때가 되니까 대충 먹었지, 몸에 필요하니 무엇을 먹어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체중을 좀 늘려야 할 필요를 느꼈고, 이런저런 시행착오 후에 지금은 단백질 보충을 위해 하루에 달걀  은 꼭 먹으려고 합니다.

 

또한, 먹는 방법도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대충 씹고 넘겼는데 어떤 시점 이후로 지금은 최대한 꼭꼭 씹어 먹습니다. 사실 “꼭꼭 씹어서 먹으라”는 말은 어릴 적부터 들었지만, 그 이유를 제대로 말해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설득력 있는 설명을 읽게 되었습니다. 즉 한국 사람들의 주식인 밥이나 밀가루 음식은 탄수화물인데, 위장에서는 이것을 분해하는 효소인 아밀라아제가 한 방울로 안 나온답니다. 결국, 아밀라아제가 담긴 침을 섞어 제대로 씹지 않으면, 우리 몸에서 탄수화물을 소화하는 마지막 장기인 췌장에 무리가 가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췌장암에 걸릴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구약 레위기에 나오는 ‘소제물’에 대해 추구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관련 말씀으로 제시된 요한복음 6장 57절을 묵상했습니다. 그 결과 위 육신의 양식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영의 양식을 제대로 먹는 >이 다시금 제게 다급한 현안으로 다가왔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것입니다.

 

사실 ‘말씀을 먹는다’ 혹은 ‘말씀을 기도로 읽는다’(pray-reading)는 말은 교회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입니다. 그러나 아침에 이 말씀을 먹고 묵상하면서, 그동안 실행해 온 <말씀 먹기>가 위에서 말하는 “나를 먹는”에 미치지 못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맥에 따르면, “나를 먹는”이 제대로 되었다면, 그다음의 “나로 말미암아  것입니다”가 저절로 이뤄져야 할 텐데, 현실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 주 예수님, 당신을 먹는 이 한 가지를 바로 실행할 수 있도록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가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며칠을 기도하고 씨름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누림과 고려가 있습니다.

 

-(나를먹는: 우선 도대체 ‘먹는다’(트로고, 5176)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연 그것이 이런 문맥에서 쓰일 수 있는 단어인가? 라는 가장 기본적인 성찰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전후 문맥에서 주님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큰 무리를 먹이신(요 6:9-13) 후에, 이러한 “썩어 없어지는 양식”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27절). 또한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과 “(내가) 생명의 ”, “(내가하늘에서 내려온 ”, ”내가  ”, ”  를 먹는 것을 대비하여 말씀하심으로, 신약 시대에 우리가 먹어야  참된 음식은 바로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임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나 식인종 이야기도 아니고 이처럼 한 인격체이신 주 예수님을 사람이 먹는다는 말씀은 참으로 귀에 거슬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 본문이 이것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면, 누가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라고 하면, 당장 심리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이단 시비에 걸리기 딱 좋은 사안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 현장에서 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그 말을 들은 제자들도 “ 말씀은 어렵습니다누가 알아들을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요 6:60).

 

‘주 예수님께서 우리 죄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거나, ‘그분이 부활 승천 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거나, 심지어 ‘그분이 부활 후에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셨다’는 말씀은 이해도 되고 큰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하고, 심지어 그 먹는 것이 ‘나로 말미암아 살 것’ 즉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갈 2:20)을 결정하는 핵심 조건이라는 위 말씀은 더 많은 관심을 끌게 만듭니다. 마치 왜 꼭꼭 씹어서 먹어야 하는지, 근육을 더 얻으려면 왜 단백질을 먹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더 요구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위 ‘먹는’에 대한 회복역 성경 아래 각주가 참고가 되었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음식이 유기적으로 우리 몸 안에 흡수되도록, 그것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거듭난 새사람 안에 생명의 방식으로 흡수되실  있도록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인 그분으로 말미암아 산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부활하신 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요 14:19-20).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려할 부분은 ‘먹는다’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일반적으로 ‘화고(5315 a,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 6:25) 혹은 ‘에스디오’(2068, 왜 여러분의 선생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십니까?, 마 9:11)인데 반해, 이 본문에서 쓰인 단어는 ‘트로고’(5176)라는 점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총 6회 사용되었는데, 특히 이 요한복음 6장에서 집중적으로 쓰였습니다(54, 56-58절). 회복역 성경 해당 각주는 이 단어가 ‘masticates’(씹어 먹고)에 해당한다고 적고 있습니다(54절, 각주1).

 

참고로, 영국의 침례교 목사이자 무디의 친구로서 복음 전도자였던 F.B. Meyer가 요한복음 6장 57절 주석에서, “씹고”(masticated), “소화하고”(digested), “동화시킴”(assimilating)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to do its work of nutrition, unless it is masticated and digested. And what digestion is to food, assimilating it with our bodies (http://www.preceptaustin.org/gospel_of_john-f_b_meyer-2#9).

 

사실 ‘씨뿌리는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같은 말씀이 땅에 떨어지더라도 밭에 해당하는 우리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눅 8:5-8, 12-15). 그러므로 먹을 뿐 아니라 ‘소화’시키고, 그것을 ‘흡수’하는 과정이 영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는가 하는 문제는 ‘먹는’ 것과 관련하여 함께 고려해 볼 부분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합당하게 먹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그러므로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소서.

에세이,나를 먹는 그 사람,요한복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