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저는 얼떨결에 결혼했습니다. 그 당시 벌어 놓은 전세 자금도 없었고, 학교 졸업 후에도 학자금 융자받은 빚이 조금 남아 있던 터라 결혼은 취직 후 한 5년 지난 뒤로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주권적인 안배로 제 생각보다 더 일찍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인 방면은 물론이고 남편의 역할이나 부모 되는 것이 무엇인지 등 결혼에 대한 사전 준비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이런 저와 달리,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결혼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본인의 신부도 손수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이 결혼하기 원하신다’는 개념은 적지 않은 분들에게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은 분은 이런 사상이 신구약 성경 곳곳에 녹아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한 성경 교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신부와 관련된 네 여인들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를 분석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워치만 니, 영광스러운 교회). 그 여인들은 성경의 처음 책인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배필인 하와(창 2:22-23, 4:1)와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있는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계 21:2, 9-10),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엡 5:24-27)와 대적의 박해의 표적인 된 “해를 옷으로 입은 한 여자”(계 12:1)입니다.
성경은 아담은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말씀합니다(롬 5:14). 따라서 아담의 아내인 하와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예표입니다. 또한 어린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은 신약의 서신서가 다루는 교회의 최종 모습입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를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의 이야기>라고 말하더라도 큰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립시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결혼 날이 다가왔고, 그분의 아내도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게 되었는데,
그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입니다(계 19:7-8).
오늘 아침에 교회가 다루는 교재의 순서를 따라 위 말씀을 여러 번 읽고 먹으면서, 이 <하나님(좀 더 정확히는 ‘하나님-사람’)과 사람의 결혼>에 대해 다시 한번 깊게 묵상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하나님이 결혼하기 원하신다.’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는 뭔가 어색하고 듣기가 불편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사 54:5)라는 말씀을 읽고, ‘어,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 추가로 알게 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 .”(호 2:16)라는 말씀과 “내가 여러분을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기 때문입니다”(고후 11:2)라는 말씀은 저의 관념을 바꾸게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과 결혼하기 원하신다’는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 결혼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결혼 상대인 믿는 이들은 결혼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라는 식으로 이 주제를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여기에서 결혼의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의 연합’이라고 개념을 정리해도 크게 빗나가지 않습니다. 문제는 과연 믿는 이들이 어떻게 해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신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위 본문을 깊이 묵상한 결과,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했다’는 말과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게 되었다”는 말과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은 사실상 같은 내용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어린양의 아내가 되는 준비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는 것’ 즉 ‘의로운 행실’'을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묵상이 이 지점에 이르자 이제는 준비된 신부가 입었다는 결혼 예복인 세마포 옷의 주된 특징인 ‘빛나고’(bright) ‘깨끗한’(clean)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주님 앞에서 고려해 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모두 타락 이후에 빛나고 깨끗하기는커녕 하나님 보시기에 어둡고 더러운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존재였던 우리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처럼 빛나고 깨끗한 존재와 표현을 갖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빛나고(람프로스, 2986): 주님 앞에서 이 단어를 깊이 고려할 때, 문득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들답게 행하십시오’(엡 5:8)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울러 “그분(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는 말씀도 생각났습니다(요 1:4, 1).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세상을 향해서 빛나는 존재가 되고 우리의 행동에서 어둠이 아닌 빛이 비취게 할 수 있을까?
단지 빛에 대하여 말하고 가르치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 압니다. 대신에 우리가 끊임없이 말씀 앞에 나아가서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을 접촉하고, 또 그 생명 안에 있는 빛이 우리의 존재를 비추게 하고, 그 결과 우리 존재가 주님의 영광인 그 빛으로 흠뻑 적셔지도록 자신을 빛 앞에 지속해서 열어드리는 길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고후 3:18).
깨끗한(카다로스, 2513):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역시 에베소서 5장 26절인 “그리스도께서 말씀 안에 있는 씻는 물로 교회를 깨끗이 하여”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이어서 손을 안 씻고 음식을 먹는 것보다 마음에서 입을 통해 나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모독”이 사람을 더 더럽힌다(마 15:18-20)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렇다면 원치 않아도 타락한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문득문득 솟아나서 우리를 더럽히는 이런 것들에서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부분도 위 에베소서 5장 말씀처럼 주님의 보혈 외에 추가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더 정확히는 그 말씀 안에서 흘러나오는 씻는 물인 ‘하나님의 흐르는 생명’(출 17:6, 고전 10:4, 요 7:38-39, 계 21:6, 22:1, 17)만이 우리 존재를 씻어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분들이 보혈의 샘에서 씻는 것은 알지만 이 ‘물두멍’에서의 씻음은 잘 알지 못합니다(엡 5:26의 ‘씻음’(washing)은 헬라어로 ‘루트론’(3067)인데 구약의 ‘물두멍’(출30:18-21)을 가리킴. 따라서 ‘Douay-Rheims Bible’은 이 부분을 ‘by the laver of water’로 번역함).
결국 어린양의 빛나고 깨끗한 신부로 단장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산 말씀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단지 성경 공부의 대상으로만 삼거나 자신의 교리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다면, 결코 이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분들이 이 덫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의 체현이고(계 19:13),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먹거리입니다.
오 주님, 당신은 우리의 참 신랑이십니다.
생명과 빛의 말씀으로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속히 단장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