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35회 - 코이노니아(교통)
에세이
청지기 , 2021-06-18 , 조회수 (327) , 추천 (0) , 스크랩 (0)


헬라어 ‘코이노니아(2842)’는 많은 분에게 ‘교제’ 혹은 ‘친교’라고 알려져서, ‘교통’이라는 말은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교통’ 그러면 ‘교통순경’ 혹은 ‘교통사고’가 생각이 난답니다. 저도 오래전에 이 ‘교통’(交通)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약간 어색했었지만, 크게 문제시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개역 성경에도 이 단어를 ‘사귐’(요일 1:3) 만이 아니라 ‘교통’(고후 13:13)으로 번역한 곳이 있고, 웨스트민스터 신조(박윤선 역)에도 ‘거룩한 교제와 교통’(holy fellowship and communion) (26장 2절)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나란히 사용된 헬라어 ‘κοινων?α’와 라틴어 communio는 같은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아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겸하여 관련 구절들을 추구해 볼 때, ‘교제’ 혹은 ‘교통’이라는 용어의 차이보다도 이 단어가 성경 본문에서 쓰인 바른 의미를 그동안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여러분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아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교통 안으로 부름받았습니다(you were called into the fellowship of His Son, Jesus Christ our Lord)(고전 1:9).

 

위 말씀을 읽을 때 ’into’(에이스, 1519)라는 단어가 예전과 달리 강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in’과 달리, ’into’는 “장소나 시간, 상징적으로는 목적, 결과에 도달되거나 들어가는” 동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존재였지만, 그분을 믿어 그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요 14:20). 그러므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과 교통(혹은 교제)한다는 말은 이 땅에 있는 우리가 저 멀리 떨어져 계신 분과 뭔가를 소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가 “그리스도께 견고하게 ()붙여진” 상태(firmly attaches us)(고후 1:21, 롬 11:17)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요 15:5)로서 서로 간에 끊임없는 연결과 전달과 유기적인 왕래를 갖는 것입니다.

 

위 본문에서 말하는 ‘그분의 아들의 교통’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지를 묵상하며 주님 앞에 머물 때, 교통(코이노니아)에 관련된 많은 구절과 인상들이 제 안에 떠올랐습니다(행 2:42, 고전 10:16, 고후 13:13, 요일 1:3, 7).

 

1. 교통의 정의 : 요한일서 1장 3절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 교통 갖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우리의 교통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위 말씀 중 ‘교통’에 대해 신약성경 회복역은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헬라어로는 ‘공동 참여’, ‘공통 참여’를 뜻한다. 교통이란 영원한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이며, … 이것은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생명수의 흐름으로 묘사된다(계 22:1). 모든 참된 믿는 이들은 이 교통 안에 있다(행 2:42). 이것은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계신 그 영으로 말미암아 계속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령의 교통’(고후 13:14)과 ‘(우리의) 영의 교통’(빌 2:1)이라고 불린다(이하 생략)(요일 1:3, 각주 3).

 

위 각주 내용이 맞는다면, 성경이 말하는 교통은 (보좌로부터) “영원한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말은 그 생명의 흐름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성도들과 교통한다는 말은 ‘그 생명의 흐름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오는 생명의 흐름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전기가 각각의 전구 안으로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2. ‘교통 관련된 개인적인 누림과  비췸

 

첫째, 성경이 말하는 ‘교통’은 그리스도의 몸을 전제한 개념이라는 빛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생명수의 흐름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머리)로부터 나와서 새 예루살렘 전역으로 흘렀습니다(계 22:1). 새 예루살렘의 전신(前身)인 오늘날의 교회 혹은 교회 생활 안에는 이러한 생명의 ‘교통’이 여러 방면에서 막혀 있습니다. 이처럼 생명의 교통이 막혀 있는 것이 소위 교회 안에서 생기는 문제들의 근본 원인입니다. 일반 사람의 몸 안에는 세 가지가 흐른다고 합니다. 첫째는 의 순환이고, 둘째는 신경 체계의 순환이며, 셋째는 (氣)의 순환입니다. 이 셋 중에 어느 하나만 문제가 생겨도 우리의 몸 안에는 병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영적인 몸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골로새서 2장 19절은 “머리를 붙들지 않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따라서 교통은 각 지체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드는 ’에서 출발합니다. “육체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교만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종종 이러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듦에서 떨어져 교통의 단절을 맛봅니다(롬 8:6, 갈 5:4).

 

셋째, 하나님께서 빛 안에 계심으로 우리도  안에서 행할 때만 교통은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요일 1:7). 만일 어떤 형제가 돈 버는 일로 “그분의 아들의 교통”에서 멀어졌다면 “신실하신 하나님”(고전 1:9)은 때로는 그 사업을 망하게 해서라도 그가 다시 아들 하나님과의 교통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빛이신데 우리는 어둠 안에 있으면서 그분과 교통(교제)을 추구한다면, 구조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일입니다.

 

넷째, 어떤 이유로든 자신 안에 메마름이 있고 어둠이 느껴진다면, 즉시 주님께 나아가 빛가운데 드러난 죄들을 자백할  교통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요일 1:9, 7). 한번 거듭났으면 취소되고 지옥 가는 일은 없지만,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는 일은 참된 믿는 이들도 종종 경험하는 일입니다. 워치만 니는 죄를 안 짓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최근에 자백한 사람이 가장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다섯째,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된 교통은 1) 생명의 자람, 2) 분별  거룩한 , 3) 주님의 몸의 건축이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엡 4:16고전 10: 21, 행 2:42, 44-47). 사실 이것이 위 고린도전서 1장 9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아들의 교통 안으로 부르신 이유이십니다. 이와 달리, 어떤 기적적이고 은사적인 현상이나 체험(예를 들어, ‘하나님의 음성 듣기’)이더라도 그 안에서 주 예수님의 인격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런 것들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장한 일종의 혼합일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우리를 모든 속된 것으로부터 

당신의 아들의 교통 안으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들 모두  교통 안에 계속 머물면서당신의 성품으로 적셔지고,

 몸의 지체로서 당신의 인격의 충만한 표현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에세이,코이노니아,교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