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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10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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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독자, 저자 중심에서 예수중심으로 먼저 이해해야 한다]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비유로 자주 가르친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을 깨닫게 하려고 한 목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숨기시므로 자신이 이루려는 구원의 목적인 십자가와 부활을 이루려고 비유로 가르친 것이다. 이렇게 구원의 일을 실제로 풀어서 설명하지 않고 은밀하게 비유로 유대인에게 가르친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은밀함이 신약의 교회에 의해서 잘 드러나게 될 때에 예수의 비유가 온전히 설명되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은밀하게 비유로 전파 되었기에 신약의 교회시대에서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공관복음의 이해를 풀어서 이해해야 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 공관복음의 기록은 사실과 사건 중심으로 기록되었기에 사실 이러한 공관복음에 대해서 따로 설명하는 노력이 충분히 없었다는 것은 공관복음의 이해가 오늘날 까지 우리들에게 은밀하게 다가오게 만든 한 요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리 쉬운 비유도 사실 어렵게 다가오게 된 것이며 또는 문자적으로 자의적으로 쉽게 해석해버리는 주관적인 해석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 예를 들어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우리는 도덕적인 설교로 예수의 주인공 관점이 아닌 자신이 이러한 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우리도 이렇게 도덕적으로 밀알이 되어서 죽어지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주관적 적용 중심으로 가르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주관적으로 적용한 것은 실재 그 내용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감추어지게 만든 것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예수 주인공 중심으로 접근해야 된다. 예수의 이 비유는 한 알의 밀이라는 도덕적인 단순한 교훈이 아닌 마치 X파일 같이 전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사실 예수가 성취하는 십자가로 그리고 신약의 교회가 새롭게 해석해야 될 문제임에도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것과 무오 한 것에 대한 맹신으로 과감한 신학적인 접근이 힘들어진 것도 사실이다. 물론 무오 한 성경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성경에 대한 복음중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는가는 역사적으로 볼 때에 너무 긴 시간을 보낸 것이다.
오히려 공관복음의 이해에 대한 것도 재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긴 세월을 역사 속에서 보내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의 지식과 지혜가 중심이 된 것으로 성경에 대한 진리는 오히려 역으로 감추어지게 된 것이다. 예수에 대한 공관복음을 세상의 지식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복음이 신앙과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 간과하게 만든 것이다.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로 볼 때에 복음의 의미가 참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은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러한 한 알의 밀과 같이 자신의 희생이 언급되고 있다. 이 예수의 비유는 단순한 도덕적인 설교가 아닌 자신이 이루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비유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이 비유대로 한 알의 밀과 같이 십자가로 희생하고 그리고 많은 구원의 열매를 지금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국에 대한 비유도 당시의 것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자신이 이루려는 구원의 중심인 십자가가 항상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다 그런 것은 아니나 대부분)
그 예로 우리가 알고 익히 알고 있는 겨자씨의 비유도 하나의 씨라는 것이 강조 된다.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자신으로 오는 구원을 가리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일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자신이 이와 같은 작은 겨자씨와 같다는 비유로 전파 한 것이다. 그리고 누룩의 비유도 누룩이 밀가루에 들어가서 풍성한 것으로 나타나게 되듯이 예수는 누룩과 같이 밀가루 속에 희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살아나자 마치 부풀어 오른 밀가루와 같이 교회들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나 사건을 예수자신에게 중심으로 두려는 것은 예수가 이러한 비유나 사건을 행하면서 자신이 최종적으로 스스로 이루려는 십자가의 길로 걸어간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유도 그 십자가의 길과 떨어질 수 없고 그의 사건도 그의 십자가의 길을 위해서 행한 준비의 성격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사역의 은밀성은 유대인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비유와 사건으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결국 예수의 비유를 깨닫지 못하고 그를 죽음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비유의 이해를 예수 중심으로 십자가를 넘어서 부활의 교회에서 예수의 비유와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공관복음 본문 자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한계는 예수의 이야기가 단순한 문학적 도덕적인 글들로써만 독자들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실재로 교회에서 복음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유대인들이 알지 못했던 당시의 상태와 같이 교인들에게 단순한 도덕적인 교훈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 사실 큰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예수가 이룬 성취의 십자가와 부활과 깊숙이 연관된 예수의 공생애의 사역과 가르침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 할 때에 예수가 죽기 전 공생애의 사역과 그 말씀이 은밀한 위치로 온전히 정해진다는 것이다.
또 한 예로 예수가 말씀하신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너희가 찾을 것이요 라는 말씀도 아직 오지 아니하고 아직 이루어야 될 말씀이며 명백히 성령을 주실 것이라는 예언적인 말씀과 연관되기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 구하라는 것과 찾으라는 것에 대한 성취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이 말씀을 성령과 연결시키지 않고 기복적인 물질과 연관 시켜서 설교하는 것은 본문 말씀과 상관없는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사역 당시의 상황과 그 이후의 성취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이는 약속과 성취의 중심에 예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이 약속과 성취의 중심적인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 주인공 중심의 이해는 예수가 사역의 중심이며 예수가 구약의 약속을 이루는 중심으로 일하고 있다는 이해이며 예수가 그 성취자로써 일한다는 것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린 것도 기적 자체에 무게를 두고 설명하고 우리의 신유 은사를 정당화 시키는 것보다는 이러한 일이 예수 자신의 부활을 염두해 두고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씀도 자신의 부활을 두고서 설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부활한다는 예언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실재로 부활의 주가 되었고 생명의 주가 된 것이다.
이렇게 부활에 대한 예언적인 것을 나사로를 살아나게 함으로써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예수는 부활을 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장차 부활 할 것을 두고서 가르친 예언적인 의미로써 이해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연결해서 예언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어야 하는 또는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요나의 표적을 가지고 예언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왕의 혼인 잔치의 비유도 사실상 예수 사역 당시의 것이 아닌 장차 예수로 말미암아 왕의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이다(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참여하는 잔치). 왕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왕의 잔치는 여기가 아닌 하늘나라이다. 이는 여기는 혼인 잔치로 초정되는 지상이라면 저기는 그 왕과 같은 하나님의 나라에 죽어서 들어간다는 것이다.(혼인 잔치에 참여 그러나 혼인은 재림으로 이루어짐) 이는 여기에서(땅)는 초정이 전부이며 저기는(낙원) 잔치가 열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여기에서는 예수로 말미암아 초청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초정은 사실 예수 당시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실재적으로 초정되어 들어가는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예수 오기 전에는 이러한 왕의 잔치와 아들의 잔치에 들어오지 못했으면 예수의 죽음으로 구약의 성도들이 들어왔으며 예수의 부활로 현재 산자들이 초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 낙원은 현재 이미 예수가 부활해서 잔치가 열려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죽어서 들어가는 것이며 여기에서는 초정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라는 지상의 현재성과 달리 이해하는 측면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통치와 구분된 죽어서 가는 천국과 잔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의 보편적인 천국 잔치는 예수의 죽음으로 이미 열려졌으며 그 잔치의 기간은 예수가 오실 때까지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지막 혼인은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예수의 사역 당시의 혼인 잔치의 비유도 사실상 장차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말미암아 본격적으로 성도들이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시록의 혼인 잔치를 재림 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예수가 설명한 혼인 잔치의 비유를 현재에도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약화 시킨 것이다.
이러한 비유의 적용이 예수의 죽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없이 예복도 준비할 수 없고 예수의 부활이 없이 하늘에서 하얀 세마포를 입는 영적인 의미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마22:1-14)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열 처녀의 기다리는 기간이 예수의 부활로 신약시대의 교회가 기다리는 종말의 기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예수라는 신랑이 비유로 설명되어진다. 신랑이 언젠가 온다는 것은 신랑이 이미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비유의 성취에 있는 교회시대) 신부인 열 처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이 또한 신랑도 교회시대에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는 신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과 신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부활한 예수가 하늘에서 재림으로 올 때까지의 기간이며 신랑의 의미는 예수가 이미 죽어서 부활하여 성도들의 신랑이 되어서 기다린다는 것이다.
결국 신랑으로 기다린다는 기간이 지금의 교회시대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땅에서 예수로 죽은 자들이 열 처녀와 같고 그들이 기다리는 자는 예수신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간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그가 살아난 그 때부터 예수는 모든 성도들의 신랑이 되어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잔치에 초정도 이 기간에 해당) 신약 시대에 성도들이 기다린다는 신랑은 부활한 신랑을 의미하며 그리고 신약 시대에 죽어서 기다리는 열 처녀들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을 의미한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던 때인 과거에는 즉 구약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품속에 있었던 때와 그리고 세상에 사역을 하고 있을 때의 예수는 신약시대 교회의 성도들이 기다리는 부활의 신랑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약시대 그 때에는 초림을 기다렸고 초림으로 세상에 온 예수는 성도들의 신랑이 되기 위해서 죽음과 부활로 새롭게 살아난 것이다. 예수신랑은 죽음과 부활로 하늘에 계시며 그 부활의 신랑이 재림 때에 세상에 다시 오게 된다는 것이고 우리는 부활한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종말의 기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신랑의 의미는 부활한 신랑을 의미하며 열 처녀는 그 부활한 신랑으로 죽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
이렇게 예수의 열 처녀의 비유와 예수의 혼인잔치의 비유가 모두다 예수 사역 당시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지는 것을 두고서 예언적으로 설명한 비유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 자신이 장차 자신의 죽음으로 이루어질 것을 두고서 설명한 예언적인 비유이다.
또한 종말의 기간에 해당되는 것이 있는 이러한 비유(왕의 잔치와 열 처녀의 기다림)가 있는가하면 마지막 날의 사건의 것도 있다.
마지막 사건은 예수가 번개 같이 오는 재림에 해당되는 것으로 도적이 갑자기 오는 것과 같은 비유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예수의 비유에서 결정적인 종말의 사건이 있는가하면 종말의 전 기간에 해당되는 열 처녀의 비유와 왕의 잔치 비유로 구분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죽고 부활한 것으로 이러한 모든 것이 온전히 적용 되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죽음 전에 이러한 비유나 사건들이 세상에 아직 해당될 수 없고(자신의 부활로 이루어지는 비유이기에 사역 당시에는 실재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고) 죽음으로 이러한 일이 적용되어지게 된다는 것에서 죽음이전에는 실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가 신약 시대에서는 예언이 아닌 실재적인 기다림이 되고 실재적인 성취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사역 당시에는 누구도 이러한 비유에 대부분 실재 적용되어진 것이 아니다. 잔치에 들어오는 것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지며 신랑을 기다리는 것도 예수가 하늘로 올라간 이후 그 신랑 되신 예수를 교회의 성도들이 기다리는 것이다.
[다른 글들은 기독교 신문들 안에서 자유게시판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김 인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