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대충 답변해드리겠습니다.질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진리토론방
, 2003-12-10 , 조회수 (283) , 추천 (0) , 스크랩 (0)
이번 글은 먼저 반론한 글이며 대충 이글이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더 이해를 구하고자 위에 공관복음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1. <변화산의 사건에 대해서 반론>
사람의 육체는 죽으면 다시 육체를 입을 수 없다. 모세와 엘리야의 그러한 모습이 실제적인 것이 아닌 환상과 같이 나타난 것이다. 육체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만약에 육체로 실재 나타나게 된 것이라면 예수의 부활이전에 사람이 부활했다고 설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아무것도 아닌 환상이라는 것보다는 환상과 같이 그들이 나타난 것이다(마치 텔레비전에서 사람이 나오나 그 텔레비젼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것이 아닌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사실 탤레비젼에 있는 것이 아닌 다른 나라에 있지만 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영상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그 영상이 실재가 아닌 실재를 드러내어 주는 그림영상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으로써 있기에 음부에 있는 영이 이러한 모습으로 세상에 환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영이 실재로 세상에 온 영이 아닌 음부에 있으나 환상으로 세상에 그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고 그 환상으로 나타난 그들이 가짜로 이야기한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실재로 그들이 이야기한 것이나 그 모습과 현상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의 꿈속에 실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제가 꿈속에서 보이는 것으로 현실적인 나타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는 하늘에 있으나 사람의 꿈속에 예수께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꿈이 아니더라도 현실에서 환상으로 그의 실재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환상은 이와 같이 살아있는 자들이 경험한다면(의식이 있는 가운데) 꿈에서 나타난 것은 의식이 없는 가운데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변화산의 환상은 실재적 환상이라는 것이다. 가짜로 보인 것이 아닌 그 실재의 영들이 환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실재 환상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죽으면 구약에서 죽은 자들의 처소로 알려진 그 곳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신약에서 성도들이 죽으면 음부나 스홀에 간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듯이 구약에서 누구도 신약의 성도들과 같이 낙원이나 천국에 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보다 앞서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늘에서 왔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 온자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 간자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누구도 죄가 있어서 하늘에 갈수 없다는 것이다.(율법의 기준으로) 하늘의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려는 자들은 구약에서는 음부, 스홀에서 기다렸다면 신약에서는 성도들이 낙원과 천국이라는 곳에 바로 들어간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죽은 자들의 처소가 변동이 된 것은 예수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환상일 수도 있고 영이 실재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환상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한 것임)

<나사로이야기 비유인가? 실재인가?>

신학적으로 논쟁이 될 만한 내용이다. 사실 실재적인 인물이라면 나사로를 그 당시 사람들
이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배경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사람의 이야기를 실존적인 인물은 구약에서 거의 끌어다가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익히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기타의 인물 등이다. 그런데 이 나사로는 과연 실존인지 구약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야기가 사실 비유적으로 거의 설명되는 것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임금을 통한 심판이나 열 처녀의 비유이나 또는 기타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재가 아닌 비유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예수의 말씀이 실재적인 인물의 인용이라면 실재적인 내용으로 설명되어 진다는 것이 가능하다면 아브라함과 나사로 그리고 부자로 나타나는 것이 실재적인 것인가? 비유인가? 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나오기에 흔히 실재로 생각할 수가 있다. 그리고 거지도 단순한 거지로 나오는 것이 아닌 나사로라는 이름이 거론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실재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의문이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실존적인 인물이 사용되었기에 실재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하나가 아브라함의 품속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품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실재의 사건으로 볼 때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예수가 말씀하신 대로 동일한 자들이며 그 영들이 천사와 같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 이야기는 실재적인 것이 아닌 비유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품이 아닌 하나님의 품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품속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아브라함으로 비유해서 표현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동일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품속에 들어간다면 아브라함이 죽어서도 모든 사람들을 품속으로 품어야 되는 위치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단순한 비유가 실재로 생각하게 한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게 된다고 말해야 실제적인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실재 있었던 과거의 것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현재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비유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만약에 실재적인 것이라면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도 아브라함의 품속에 있어야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이나 바울과 같은 사람도 아브라함의 품속에 있어야 된다고 주장해야 된다. 아브라함의 위치가 혈통적으로 중요한 위치이지 죽어서도 혈통적인 위치로 사람들의 대 조상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예수가 아브라함으로 비유를 설명한 것은 당시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조상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의 비유가 이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상상 속에서 비유로 설명 되어진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 과대 포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는 그들이 생각하는 아브라함과 지옥과 천국의 배경을 가지고 설명한 것이다. 예수는 나사로 이야기가 비유이기에 그의 내용이 실재와 다르다 해도 문제가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 비유의 내용에서 천국과 지옥의 배경은 유대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배경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예수는 이러한 배경을 가진 자들에게 비유로 알아듣게 설명한 것이다. 지옥이 불에 타는 곳이라면 이러한 것이 실재인가? 죽은 자들의 영이 세상에서 말하는 불로 그 영들에게 뜨거운 고통을 줄 수 있는가? 세상에서 말하는 불을 사용한 비유를 지옥이 불에 타고 있다고 가르치고 구더기가 실제로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떻게 죽은 영들이 육체가 없이 세상의 구더기로 지옥이라는 곳에서 고통을 당하는가? 그리고 불이 실재적인 것이라면 부자가 간절히 물을 요구한 것에서 그 물이 실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해야 된다.

죽은 영들이 내세에 가서도 세상의 물로 뜨거움을 달랜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렇게 세상의 것과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을 실재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대단히 무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살았을 때에 믿어야 된다는 것과 죽으면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비유로 보아야 한다.

설령 이러한 지옥이 현재 있더라도 죽은 영들이 육체적인 고통으로 지낸다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마지막 재림 때에 부활하여서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이 죽지 않는 육체를 가지고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재림으로 오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최종 심판에 해당된다. 이 심판은 실재적인 육체적 고통으로 영원한 것이며 비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나사로 비유는 도저히 실재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신학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부자가 호소할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는 표현이 신학적으로 비유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신약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비유한 내용인 것이다.

(누가복음 13장 28절 해석)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선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있고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본다는 말씀에 대한 이해는 현재 하나님 나라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이 아닌 가까운 미래에 너희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선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을 너희가 본다는 것에서 너희가 보는 그 때는 현재가 아닌 너희들이 죽어서 본다는 것이다.

예수로 오는 구원에 의해서 아브라함과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을 너희가 본다는 것이지 예수 죽음 이전에 하나님 나라에 그들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즉 지금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너희들이 죽어서 그들을(아브라함과 성도) 보게 된다는 것이며 이는 예수가 죽음으로 아브라함과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있게 된 것을 볼 것이며 예수를 지금 반대한 너희들은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며 밖에 쫓겨난 것을 스스로 알게 된 다는 것이다.
그리고 29절 동서남북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다는 것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후에 오는 신약의 모든 성도들이 죽음으로 오게 된다는 것이다.
앞과 뒤의 전체적인 문맥상 현재가 아닌 가까운 미래 특히 예수의 죽음이후에 죽어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이해가 아닌 것이다.
26절에서 주여 우리가 주와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으로 예수를 세상에서 잘 알고 있는 자들이 구원으로 들어가게 할 것을 요청한 것은 예수당시의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신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 간청해도 그들은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를 거역하는 현재의 너희들은 아무리 주여! 주여! 외쳐도 아무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예수는 예수 자신을 거역하는 그들에게 죽기 전 설명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모든 세상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거역한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라는 것에 대한 반론>

신구약으로 나누는 것이 세대주의라고 한다면 모든 기독교가 세대주의가 된다.
더욱이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누는 것은 이미 세대주의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림자와 약속 그리고 실체와 성취로 나누는 것이 나의 신학의 특징이다. 그 중심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누는 것은 바울 신학의 중심이 이와 같이 나타난다는 것에서 더더욱 설득력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분은 시간을 초월한 나눔이 아닌 예수가 시간 속에서 죽었다는 것에서 예수의 죽음 이전의 것과 이후의 것은 분명하게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언약에 대해서 엣 언약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시간적으로 지나간 것이며 그 결정적인 사건이 예수의 죽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 옛 언약에 있었던 구약의 사람들과 달리 새 언약에 들어온 성도로써 살아간다. 그 시작이 언제인가? 그 시작은 예수의 죽음으로 예수이전에 죽었던 모든 영들이 새 언약에 적용됨으로써 낙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자들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육체로 산자들을 위한 부활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누가 예수를 구주로 믿을 수 있겠는가? 이 부활은 증거이며 확신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로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보이시고 부할 한 주님으로 세상에 증거 되게 한 것이다. 만약에 주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 일상으로 돌아가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한 주님의 증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이는 예수의 부활이 시간적으로 세상에 육체로 산자들을 위해서 먼저 부활한 것이다. 산자들에게 부활한 주님에 대한 소망을 주고 그 주님으로 실재적인 교회 공동체가 형성이 된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은 그림자적인 교회라면 실체적인 교회는 신약의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을 마지막 날 재림 떼에 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산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또 모든 죽은 자들과 산자들의 첫 열매가 되기 위해서 부활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모든 죽은 자들에게 낙원에 대한 성취하면 예수의 부활은 모든 산자들이 그 부활한 주님으로 소망을 가지고 육체로 있는 자들이 소망 중에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옛것과 새것의 구분은 예수의 말씀에서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된다는 것과 일치한다. 옛 술은 이스라엘과 그리고 그 나라가 된다면 새 술은 우리 신약의 교회와 새 부대는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새 언약에 의한 하나님 나라가 아닌가?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과 은혜로 나누는 것이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율법과 은혜를 나누는 동시에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님을 또한 밝히는 것이다. 오히려 율법과 달리 은혜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죽음과 부활이전의 것과 이후의 것은 이렇게 언약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눈다고 새 언약에 의해서 율법이 사라졌다고 누구도 증거 할 수 없다. 예수도 율법의 존속을 이야기하고 있다. 율법의 존재하는 방법은 사람들에게 요구한 하나님의 법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에 이루는 기준이 율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은 육체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이러한 것은 이 세상이 끝나는 그때까지 계속된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사람이 스스로 지켜야 된다는 것이 율법의 특징이라면 누구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요구에 스스로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은혜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또 한 가지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은혜는 사람의 노력에 의한 것보다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율법만 있었지만 신약은 율법과 은혜가 공존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율법 안에 있는 자들이 아닌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 된다. 구약의 성도들은 율법 안에만 살았지만 그들도 예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구약에서 언약과 율법을 이야기 한다면 신약에서는 새 언약과 은혜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에 도달 할 수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에서 율법과 옛 언약의 관계가 아닌 은혜와 새 언약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율법은 시간적으로 세상에 끝까지 존속되나 언약은 바뀌어 진 것이다. 이는 그림자 언약이 실체의 언약으로 바꾸어진 것이다. 구약의 그림자 언약으로 죄 사함이 가능하다는 것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로만 죄 사함이 가능한 것이지 예수 없이 죄가 사해진다는 것은 무시간적인 적용으로 시간적으로 이루어진 두개의 언약(옛 언약과 새 언약)과 부합되지 못한다. 시간적으로 새 언약만이 사람의 죄가 사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성도들이 예수의 죽음으로 그들도 그때에 죄가 사해져서 음부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낙원으로 간 것으로 이해해야 시간적인 옛 언약의 약속과 새 언약의 성취를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언약에 있어서 죄와 관계는 구약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 신약에서는 실제적인 죄 사함이 가능한 것은 예수가 이룬 새 언약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구약에서는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이 해당될 수 없다. 만약에 이 선포가 구약에서도 해당된다면 예수가 없이도(구속의 행위) 그들이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 된다. 이는 심각한 언약의 그림자와 실체의 관계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사함이라는 것 이전에 두 언약의 관계와 그리고 그것이 시간적으로 구약에 있는 자들에게 옛 언약이 적용되었고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새 언약으로 적용되어진 것을 시간적으로 예수가 오셔서 죽음으로 이루었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렇게 언약이라는 것이 사실상 세상에 살아있는 자들에게 해당된다. 세상에서 옛 언약이 있었던 때가 있었고 지금은 새 언약이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 언약만이 신약에 있는 이유는 그 새 언약이 옛 언약 대신 이루어진 성취의 언약이라는 것이다.

즉 새 언약은 엣 언약 안에서 온 것이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온 것이므로 시간적으로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사라진 것이다. 예수는 먼저 옛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의 혈통으로 오셔서 새 언약을 이루는 구속의 일을 하시고 새 언약을 이룬 것이다. 이스라엘의 언약 안에 예수가 오셔서 먼저 옛 언약 안에서 자신이 희생하고서 또 다른 새 언약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스라엘의 언약은 예수로 이루는 새 언약을 위한 그림자적인 성격이며 그리고 그 옛 언약 안에 있었던 자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새 언약과 연속적으로 관계하고 새 언약이 옴으로 옛 언약 안에서 죽었던 자들이 새 언약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고 낙원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새 언약이 오기 전에는 옛 언약이 그림자로써 서 있었던 것이다. 그 그림자로 사람의 죄가 사해진 것이 아닌 새 언약이 옴으로 그림자 안에서 죽은 자들이 비로써 새 언약의 죄 사함에 적용된 것이다.
(다른 글들은 기독교 신문들의 자유게시판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참고 하세요)


세례요한과 예수의 글 문제제기에 대한 반론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