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32회 -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세이
청지기 , 2021-05-28 , 조회수 (410) , 추천 (0) , 스크랩 (0)


대부분은 인생의 목표를 정한 후에 그것을 이룰 방법을 찾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는 집안 족보에 그럴듯한 이름을 올리고 싶어 국회의원을 꿈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시골 동네 안방마다 벽에 붙어있던 달력 사진 속의 그 국회의원처럼, 우선 육사에 가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일반 대학에 진학했고, 어떤 계기로 사회의 구조적인 불평등과 불공정에 눈이 떠졌습니다. 그 결과,  20대 초 중반에는 소위 위장 취업하는 것과 제도권에 들어가 사회를 개혁하는 것을 놓고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 무렵 주님의 긍휼과 주권으로  현재의 교회를 만났고, 빌레몬서의 가치를 알게 된 것이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빌레몬서는 사람을 사고파는 노예제도가 있던 네로 황제 때 쓰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공정한 사회제도를 굳이 안 바꿔도 사람 자체가 바뀌면,  노예인 오네시모와 주인인 빌레몬, 사도인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사랑과 믿음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한 새사람 안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 후 지난 40여 년의 교회생활을 통해, 맏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이 되는 이 저의 확고하고도 유일한 인생의 목표가 되었는데, 아침에 누린 아래 말씀은 그 방법론인 ‘어떻게’를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고후 3:18).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분의 맏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이 되는 것이  많은 아들들에게 예정된 것이라고 하더니(롬 8:29), 여기서는 우리가 너울을 벗은 얼굴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하는 것이 그것을 이루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듭나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이 한 가지를 신실하게 실천해야 하며,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 7:21).

 

주님의 영광: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영광은 죽음과  부활을 거쳐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 영 안에 들어와 내주하시는 분의 영광입니다.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말합니다(골 1:27, 고후 4:6). 따라서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이 분에게만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거울처럼 바라보고 반사함: 한국어로는 세 단어인 이 부분은 사실 ‘거울’을 어근으로 하는 한 단어인 ‘카톱트리조’(2734)라는 원문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담은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여기서만 딱 한 번 쓰였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데, 내주하시는 주님의 영광(혹은 주 영)을 바라볼 때, 주님의 신성하고 인간적인 요소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고, 결국에는 우리를 그분의 형상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한다는 것을 거울의 기능을 빌려 설명했습니다.

 

주님 앞에서 이 대목을 묵상할 때 유사한 개념을 말하는 다음 구절들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요 6:57 상),  “영에  생각”(롬 8:6 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용서한 것인데”(고후 2:10),  “기름 바름이 … 여러분을 가르칩니다”(요일 2:27),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잠시 더 누워서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짧게 그날 하루를 주님께 헌신합니다. 잠시 후에는 한 가정과 함께 전화로 찬송 한 두 구절을 부르고, 말씀 두 구절을 기도로 읽고, 관련 해설도 함께 나눕니다. 하루 일과 중 종종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그분을 앙망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변화되지 않은 그늘과 옛사람의 요소가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한 예로 아내와의 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집사람은  노인들 돌 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밖의 일도 그렇지만, 반복되는 똑같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도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집에 오면 그날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제게 풀어놓습니다. 참고로 저는 두괄식 간결체라면, 아내는 미괄식 만연체 스타일입니다.  하루는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그래서 결론이 뭐냐?”라고 말하는 순간, 제 안에서 어떤 느낌이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그런 말투가 합당하느냐는 음성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백하고 돌이킨 후로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곤 하는데,  아내는 이렇게라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좋아합니다.

 

코미디언들에게는 무슨 유행어를 얼마나 유포시켰는지가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 생활에서도 몇 명 전도하고, 몇 개의 교회를 개척했는지, 심지어 40일 금식기도 여부도 주의 일을 한 업적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주님은 그러한 수고를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위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저는 아래와 같이 노래한 한 형제님이 간 그 길을 가고 싶어졌습니다.

 

늘 분주하나 불안함 난 결코 원치 않아/몇 가지 큰일 하기도 난 요구하지 않네/어린아이같이 주 뜻 따라가기 원하네(2). 내 마음 늘 행복하나 또 구할 것 있다면/주님께 내 사랑의 맘 다 표현하는 것/ 위한 많은 일보다  기쁨 구하리(7)(305).

 

 

 

 주님그렇습니다 위한 많은 일보다
주님의 기쁨을 구하는 길을 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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