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29회 - 생명나무의 과거, 현재, 미래
에세이
청지기 , 2021-05-07 , 조회수 (775) , 추천 (0) , 스크랩 (0)


찬송을 부르며 시작하는 하루는 은혜가 가득합니다. 이번 주는 함께 큐티하는 한 노부부 형제자매님과 다음의 찬송 가사를 ‘어메이징 그레이스’ 곡에 맞춰 아침마다 불렀습니다. ‘ 달콤한 생명나무 생명인 하나님, 죽었던 나 살아났네 그 실과 먹고서/ 주 하나님 날 이끄네 생명나무 앞에, 귀한 실과 나 먹으니 이는 그리스도/ 참된 양식 생명 공급 이는 곧 주 예수, 참된 누림 되신 주만 날 만족게 하네/ 값없이 생명나무를 먹는 게 길일세, 주를 먹는 그 사람은 주로 인해 사네(1143).’ 그러다 보니 생명나무라는 말이 계속 제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아침에 아래의 생명나무 관련 말씀까지 누리고 보니, 성경에 계시된 생명나무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땅에 보기 즐겁고 먹기 좋은 온갖 나무를 자라게 하셨고,

동산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선과 악의 지식나무도 자라게 하셨다(창 2:9).

 

위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먼저 창세기와 잠언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생명나무 관련 본문들을 읽어 보았습니다(창 2:9, 3:22, 잠 3:18, 11:30, 13:12, 15:4, 계 2:7, 22:2, 14, 19). 또한 교회에서 펴낸 관련 출판물들과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각종 자료들과 영상들도 살펴보았습니다. 그 후에 제 안에 생명나무의 정의와 성경 여러 곳에 나온 생명나무들의 연관성이 아래와 같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동산 한가운데 생명나무(과거): 일부가 관심하는 에덴동산의 현재 위치 혹은 생명나무가 사과나무였는가? 등에 대한 논의는 제게는 큰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대신에 실존 인물인 아담이 살던 ‘동산 한가운데 생명나무’가 있었다는 성경의 기록을 그대로 믿고, 그것을 신약에서 계시된 생명나무의 실재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하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참고로 회복역 성경 각주는 위 생명나무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이 생명나무는 음식의 형태로 사람에게 생명이 되시는그리스도 안에 체현되신 삼일 하나님을 상징한다. … 요한복음 1장 1절과 4절에 따르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신 말씀 안에 있다. 이 생명 곧 신성하고 영원하며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은 바로 그리스도이며(요 11:25, 14:5, 골 3:4상),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이시다(골 2:9)”(각주 2)

 

우리 안의 에덴동산과 생명나무(현재): 사실 신약 서신서에는 ‘생명나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롬 8:6)이라는 말씀은 위 에덴동산의 구도와 매우 흡사합니다. 즉 우리가 매일의 생활에서 육신의 생각을 할 때는 선악과를 먹어 (영적인)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생각을 생명주는 영이 내주하시는 우리의 거듭난 영에 두면 생명(나무)을 먹어 생명과 평안을 체험합니다. 두 나무 중 어느 것을 먹을지를 결정하는 우리의 생각이  일종의 에덴동산의 하와인 셈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옳고 그름의 영역인 선악과를 먹고 사는 경우가 많고, 생각을 영에

두고 생명과 평안을 누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음을 봅니다.  그러다 보니 다음 항목에서처럼 주님은 그러한 소수의 이기는 이에 대해  보상을 약속하심으로써  우리가 지금 생명나무를 먹도록 격려하고 계십니다.

 

낙원 안의 생명나무(장래):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이기는 이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주어서 먹게 할 것”(계 2:7)을 말씀하십니다. 참고로 여기의 낙원은 현재 첫째가는 사랑을 유지하고 니골라당의 일을 미워한 소수의 이기는 이만 참여한다는 점에서 창세기의 에덴동산이나 주님과 강도가 갔었던 그 낙원(음부)이 아니고, 새 예루살렘과 동의어입니다. 즉  이것은 이기는 이들이 새 예루살렘 안의 생명나무를 보상으로 미리 누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안의 생명나무(영원): 구속받은 모든 이들은 장차 새 예루살렘 안에서 생명나무를 제한 없이 영원토록 누릴 것입니다(계 22:1-2).

 

이러한 추구와 묵상 후에 다음 두 가지가 제 마음 안에 남았습니다.

 

첫째, 생명나무이신 주님 자신을 먹는다는 표현에 대해 일부(특히 개혁신학 쪽) 분들 안에 심리적인 불편함이 있어 보입니다. 그 결과, 주님 먹는 것을 일 년에 몇 번 안 하는  ‘성례전’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매일 심지어 매 순간 먹는 것을 암시합니다(요 6:57, 계 19:13, 마 4:4). 따라서 성례전 대신에 우리가 포도나무의 가지들로서 ‘포도나무의 진액’을 끊임없이 빨아들여 그 생명력으로 사는 모습으로 이 문제를 재정립하면 어떨까 싶습니다(요 15:1-5).

 

둘째, 저는 노력하지 않아도 남의 (논리적인) 허점과 결점이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 그동안 살면서 좋은 의도로 소위 지적질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묵상을 통해 아무리 사람의 기준에서 의미 있어 보여도 생명이 아닌 것은 하나님에게는 별 가치가 없음을 깊이 보게 되었습니다(잠 16:25).

 

 

오 주님, 당신은 생명나무의 실재이십니다.

매 순간 당신을 먹고,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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