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욥기를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때입니다. 다니던 감리교회 고등부 교사가 학생들에게 욥기를 한 달간 읽은 후에, 각자 느낀 것을 발표하자고 했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욥기를 읽었지만, 솔직히 중점을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다만 사탄도 여호와의 면전에 설 수 있다는 것, 욥이 갑자기 온갖 재앙을 만난 것, 욥과 세 친구들이 나눈 긴 대화들이 조금은 지루했던 것, 욥이 눈으로 주님을 뵌 후에는 그 많던 자기 자랑이 사라지고 오히려 자신을 혐오하게 된 것에 인상적이긴 했습니다. 이번에 교회에서 함께 욥기를 추구하면서 욥기의 내면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아래 말씀을 묵상하고 추구했습니다.
“하나님께 나 이렇게 아뢰겠네.
저를 악하다 여기지 마시고
어찌하여 저와 겨루시는지를 알려 주십시오”(욥 10:2하).
성경은 욥이 (아라비아 사막 서쪽 에돔의 한 성인) 우스 땅 사람이라고 하고, 여호와께서 노아와 다니엘과 욥, 이 세 사람을 함께 언급하신 것을 볼 때 그는 실존 인물이었습니다(욥 1:1, 애 4:21, 겔 14:14). 성경 연구가들은 그가 살던 시기를 아브라함 시대(BC 2000년경) 늦어도 모세의 때(BC 1400년경)를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오래전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욥처럼 경건한 사람이 왜 고난을 받는가?라는 질문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주제입니다. 분명한 것은, 선한 사람은 복 받고 악인은 벌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틀 안에서는 이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됩니다.
욥의 질문: 성경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경우 인간적인 관념으로는 복을 받아야 하나, 욥은 오히려 졸지에 그 많던 재산과 자식들을 잃었습니다. 더구나 본인도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지독한 종기가 나서 극심한 가려움증에 시달립니다. 욥의 몰골은 문병 온 세 친구들도 몰라볼 만큼 상해 있어서, 그들이 칠 일 밤낮을 함께 있으면서도 아무도 욥에게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위 본문은 이러한 비참한 상태 중에 욥이 한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요즘 말로 ‘주님, 저에게 왜 이러세요?’ 혹은 ‘why me?’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몇 구절 뒤에서는 “주님은 이러한 일들을 주님 마음속에 감추셨습니다. 저는 이러한 것이 주님께 있는 줄을 압니다”라고 고백합니다(13절). 이것은 욥이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 마음속에 감추인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욥기 안에서는 어디에서도 그 해답을 찾기 어렵습니다.
긴 침묵: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방식은 점진적입니다. 따라서 어떤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경 전체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그 예입니다(창 1:26). 욥과 같은 의인이 고난을 받는 이유도 마찬가지인데, 그 해답은 바울 서신에서 완전하게 계시되었습니다. 이번에 추구하면서, 욥이 막연하게 짐작했던 그 비밀은 “영원부터 모든 세대에 걸쳐 감추어져 왔고”(골 1:26), “다른 세대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비밀을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려 주지 않으셨다”(엡 3:5)라는 말씀이 제게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그야말로 영원부터 구약을 거쳐 신약 시대까지 이어져 온 그분의 ‘긴 침묵’인 셈입니다.
욥의 질문에 대한 해답: 이 주제를 묵상할 때 두 구절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겉사람은 썩어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말씀입니다(고후 4:16).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함으로써 선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롬 8:28). 참고로 여기서 ‘선’은 바로 다음절의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29절)인데, 이것은 고난을 통과할 때 그리스도를 더 얻어 신진대사적으로 변화됨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욥이 고난 받는 이유는 그의 경건한 옛사람이 벗겨지고, 그리스도의 요소를 가진 새사람으로 조성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영원 전에 예정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나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생명 주는 영으로 오셔서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의 혼을 변화시키시고, 우리의 몸을 변형시키심으로 성취될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서신서 이전에는 예표와 그림자로만 암시될 뿐, 분명한 말로 알려주기가 어려우셨던 것입니다(요 16:12-13참조).
이번 추구를 통해 제 안에 두 가지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첫째는 선과 악과 지식이 같은 범주(나무)이고, 이들 그 안에는 생명(나무)이 없다는 것, 둘째는 강재구 소령이나 <데미안>, <생의 한가운데>를 번역 소개한 전혜린 씨처럼 굵고 짧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가능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허물고 새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은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의 경륜을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고난의 환경을 통과할 때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대신에 그리스도를 더 얻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