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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14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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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는 신약의 헌금이 될 수 없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적인 요소였다. 이를 부정할 수 있는 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신약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내 놓고 시행해야한다.
십일조가 헌금이라는 주장은 어떤 변명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약시대에서 영적으로 승화시켜서 십일조를 드린다는 주장을 하려면 구약의 절기도 영적으로 승화시켜서 믿음으로 지키고 헌금을 드려야 된다는 주장을 해야 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구약시대에 짐승으로 제사를 드린 것도 승화시켜서 신약시대에서도 짐승으로 제사 드리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제사 드리면 문제없다는 무지한 주장과 같다.
구약시대에는 십일조가 의무였다. 이것은 율법적 헌금이라는 것이며 신약에서 주장되는 헌금은 의무가 아닌 믿음의 표현이며 자원과 기쁨으로 드리는 원리가 정당하게 주장되고 있다. 성경에 명백히 나타난 증거가 있으며 이는 십일조가 초대교회에서 주장되지 않고 그 어디에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히브리서에는 구약의 각종 절기와 월삭이나 안식일과 기타의 것 등이 지나간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도가 헌금을 드리는 것은 누구의 강요나 제도가 아닌 감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뿐이다. 의무는 더 이상 헌금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며 누구도 헌금의 액수가 정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에서 율법적 의식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십일조가 신약의 헌금이 되려면 율법을 지켜야 되는 정당성을 신약의 초대교회와 그 말씀에서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십일조가 드려졌다는 주장을 합리화시키려 한다면 율법이 있기 전에도 제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율법과 같은 기능을 양심이 한 시대이다. 양심이 율법과 같은 기능을 한 것이다. 십일조는 더 이상 헌금이 아닌 것이다. 이미 초대교회에도 없었던 십일조가 헌금이 되어지는 것은 한국교회의 율법적인 적용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다.
헌금은 자원해서 드리고 믿음으로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헌금은 자원으로 드리는 것에서 어떤 규제나 그리고 강제성이 없이 드려져야 하나님이 원하는 헌금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헌금을 드리면서 자유롭게 드릴 자유가 있다. 이는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헌금에 대해서 강요할 수 없다. 그가 결정하는 순수한 헌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헌금의 강조는 개인의 믿음보다도 교회의 목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교회의 건축이나 기타 물건을 사는 것 등이다.
이러한 잘못된 헌금관은 한국교회가 부를 축적했으나 참 신앙으로 헌신하는 삶이 사라진 원인이 된 것이다. 헌금의 목적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에 작정을 시키고 걷어내는 일은 안 되는 것이다. 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 십일조가 된 것이며 이러한 일을 평생 해야 된다는 것이다. 평생 작정된 헌금이 십일조라는 것인가?
회비씩으로 내어야 된다는 것은 교인이라면 드려야 된다는 의무가 생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잘 실천해야 된다는 것이 신약의 헌금과 전혀 다른 사상이라는 것이다. 신약의 헌금은 자원해서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며 드릴 때마다 언제든지 마음의 원대로 드려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헌금은 자원해서 드리기에 각자의 헌금이 다르게 나타나게 된 다는 것이다. 믿음이 다르듯이 믿음의 표현도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의 용도가 신약에서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신약시대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는 헌금과 구제금과 연보 등이 나오지만 절기나 기타의 구약적인 율법적 제사나 그 방법이 사용되지 않고 있다.
십일조가 헌금이라고 주장한다면 헌금은 자원과 기쁨이 전재된다. 그런데 십일조는 자원의 성격에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원은 규범이나 경계가 없는 스스로가 드리는 것이다. 신약의 구원이 각각 다르고 그 믿음도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믿음으로 드리는 헌금이 같을 수 없다. 개인의 소득의 얼마를 정한 자체가 이미 자원에서 규제라는 것이다.
십일조가 헌금이라는 주장이 되려면 오순절 이후 성경에서 분명하게 십일조가 주장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다행 이도 그런 구절이 없다는 것과 오히려 구약의 것들을 과거의 율법적인 것으로 치부한다는 것은 십일조가 헌금이 될 수 없는 명백한 이유이다.
한국교회의 십일조는 대단히 큰 교회의 제정에 몫을 차지한다. 이러한 이유로 십일조가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일천 번제나 신약의 절기헌금 등은 바울이 가르친 사상에 의해서 비판을 받을 만한 내용이다. 바울은 절기나 안식일이나 날이나 기타의 것들이 신앙의 규범으로 남지 말아야 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헌금은 자원이 아닌 정해놓은 틀에 의해서 헌금을 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받으시기 원하신다. 그러나 원치 않는 헌금은 단 돈 백원도 싫어하신다. 교회에 중직이 되어서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그가 교회에서 직분 자로써 부도덕한 자로 여길 것이다. 이러한 규제가 신앙의 기준으로 여기게 된 것 자체가 문제 된 다는 것이다. 십일조가 구약 성경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또 이를 거역하면 도적이 된다면 교회에 나오는 모든 평신도들에게도 강제로 걷어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신약시대에 불편하다면 이는 없어진 구약의 제도가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구약의 십일조냐? 신약의 헌금이냐?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신앙이 되지 않는 것은 이미 우리는 율법을 뛰어넘는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은혜가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에게 만약 요구한다면 우리가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을 요구할 것이다.
감사에 규제가 없으며 자원에 경계가 있을 수 없다. 십일조는 드려야 된다는 것이 강조된다. 그러나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이는 반강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헌금이 아까워서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를 징계하지 않으신다. 다만 안타까워하실 것이다. 그의 믿음이 이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을 섭섭해 할 것이다.
그러나 원치 않는 규제로 드리는 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으로 범죄 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그 죄가 더 크다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 놓은 십일조를 교회의 중직이 감히 피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의 가장 안타까운 것은 내 것을 드린다는 신앙이다. 그것이 각종 규범과 같은 의무적인 십일조 신앙이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었다. 이것이 신약에서 지켜야 된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려야 된다면 구약의 제사도 드려야 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짐승을 드리면서 그리스도를 생각한다고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십일조 말 자체가 헌금이 아닌 십일조이다. 그리고 헌금은 이미 신약 초대교회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십일조는 헌금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이는 순수한 헌금으로 교회가 운영되고 헌금이 사용되어질 것이다. 운영이 무서워서 바른 길을 피한다면 그 결과는 영적 파탄으로 나타날 것이다. 과거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가톨릭이 세상과 타협하자 오늘날 가장 부패한 교회의 이단이 된 것을 기억해야 된다.
십일조를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개혁에 대한 중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평신도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교회의 가르치는 지도자의 개혁에 호소한 것이 사실이다.
헌금이 자원해서 드리는 순수한 헌금이라면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최고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자가 헌금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교회는 믿음과 상관없이 헌금을 걷고 있다. 회비씩으로 걷는 헌금이 무슨 교회의 유익이 되겠는가? 실제로 교회의 선교비를 보면 현저히 약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교회는 돈으로 일한 것이 아닌 믿음에 의해서 일한다는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헌금을 걷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중직 자도 교회에서 의무적으로 할 수 있는 헌금이 지금의 십일조와 같은 제도이다. 헌금 그것은 신성한 것이 되는 것이다.
십일조는 그 말 자체가 율법적인 것이다.
십일조에 대한 합리화는 예수가 언급한 것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면 예수가 죽기 전에 있었던 대제사장과 제사 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당시의 구약의 모든 절기가 유효한 것이다.
십일조만이 아닌 구약의 모든 것이 지켜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죽기 전에 예수가 십일조를 언급한 것으로 십일조가 드려지다면 다른 것도 지켜야 된다. 예수도 유대의 절기 등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구분되게 된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이재는 유대의 모든 것이 과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재 새로운 영적인 질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유대인이 예수 죽기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나 이재는 영적인 공동체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새 공동체가 과거의 것에서 이미 벗어난 것이라는 것이다. 제사 제사장 그리고 법등이 이제 무효화 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게 된 것이 영적제사 만인 제사장 그리고 영적인 질서라는 사실이다. 이미 백성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은 유대인의 모든 의식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인 예수로 말미암는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육적인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과 같은 위치가 된 것이다. 그러면 십일조가 육적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것이라면 그 범위가 이스라엘의 범위이며 이스라엘의 십일조라는 것이다. 그들이 드린 십일조를 신약의 새 백성들이 드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공동체는 새 술이며 새로운 나라인 새 부대에 담아져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것에서 자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즉 예수의 첫 열매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십일조가 어떠한 용도로 사용 되었는가 살펴보면 그것이 이스라엘에 국한 된 것이고 이스라엘의 레위지파와 과부와 그리고 객 등의 용도로 사용되어졌다. 이러한 사용은 사실 이스라엘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십일조의 사용은 신약에서 헌금으로 대체된다. 헌금도 영적인 제사에 사용된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구제 등으로 사용하고 교회의 과부들도 십일조가 아닌 헌금으로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는 의무로 된 십일조로 사용되었다면 신약은 자원으로 된 헌금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즉 구약의 십일조가 헌금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미 초대교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의 용도가 신약에서는 헌금으로 사용되는 것이 나타난 것이다.
신약의 공동체가 누구든지 믿음으로 들어오듯이 헌금도 의무가 아닌 누구든지 믿음으로 드리게 된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은 율법과 그리고 의무에 의해서 행해졌다면 신약은 의무대신 믿음의 원리가 적용된다.
사실 구약의 이스라엘 자체가 십일조와 같이 경계가 있었다. 할례 등이다. 경계가 있는 자들에게 경계가 있는 헌금인 십일조가 있었던 것이다.
신약에는 구약의 백성과 같이 경계가 없는(이방과 유대) 백성이 경계가 없는 헌금을 드리게 된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헌금과 같은 것이라면 신약에서의 헌금은 구약의 십일조와 달리 누구나 믿음으로 드리고 또 그 경계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십일조라는 것이 사실상 신약의 헌금에 대한 예표적인 성격이라는 것이다. 영적인 공동체가 이제는 더 이상 구약의 경계와 의무에 있지 않고 자유와 믿음에 의해서 드려지게 된 것이다
구약에서 경계가 되는 십일조를 만들어 놓은 것은 그것이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다른 것과 구별된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고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요구대로 사용되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신약에서도 헌금으로 구별시켜서 하나님의 선한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목적이 잘 드러난다. 그것들을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되게 한 것이다. 구약에서 레위지파가 사용한 것처럼 사도와 감독과 교회에서 일하는 자들로 사용된 것이며 그리고 구약에서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사용되어진 것을 신약의 성도들 중에서 과부와 객과 고아에게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구약의 십일조와 신약의 헌금이 다르지만 서로 깊이 연관되는 부분은 마치 구약의 것이 그림자의 것이라면 신약의 것은 참으로 쓰여 진다는 것이다.
구약의 백성이 그림자적인 백성이라면 신약의 백성은 실체라는 것이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그림자라면 신약의 예수의 대제사장이 실체라는 것이며 구약의 제사장이 신약의 성도가 된 것이다. 구약의 백성이 육적으로 부른 것으로 백성을 삼았다면 신약의 백성은 영적으로 부른 참 백성이라는 것이다.
십일조가 신약의 초대교회에 있어야 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육적인 나라와 대제사장이 이미 지나갔고(이는 이미 끝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새롭게 시작 된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이제는 믿음으로 육적인 나라가 아닌 영적인 나라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새롭게 시작된 나라의 백성이 육적인 이스라엘의 것을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의 멜기세댁의 십일조가 멜기세댁과 같은 자가 이제는 예수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신학자들의 해석)
이러한 것은 학자들의 의견대로 분명하게 예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구약의 멜기세댁이 신약과 직접관계 될 수 없다. 과거 이스라엘도 그림자로 지나간 것이 되었는데 만약에 멜기세댁이 신약에 직접연관 된다면 이는 과거 이스라엘이 지금도 직접 연관되어야 된다는 주장과 같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시간적으로 과거가 옛것이 되어버린 것이며 새로운 것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 그리스도와 관계된 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는 한국교회의 신앙이 구약과 신약에서의 관계에 대한 정립이 분명하게 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관계가 정립된 신학이라면 십일조는 드릴 수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십일조만이 아닌 교회의 헌금이 철저하게 인위적인 것이 된 것이다. 어떻게 헌금을 발표하고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헌금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고 사람에게 인정된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