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모르는 것인지 자기 주장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하기때문인지 계속 님은 소위 핀트를 못맞추고 있습니다.
님의 주장
*주의 : 마23:23절의 내용이 율법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율법안에서 외식의 지도자가 떼어 먹었다는 것이 24절에
가서 바로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이에서 하루살이는 박화와 회향과 채소와 같이 작은 텃밭에서의
소산물이며 약대는 수입원이된 재물의 큰 것입니다.
사두환님,
박하 회향 근채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재배되던 농작물의 종류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유대회당에서 방향제나 향품등의 용도로 쓰였는데 유대인들은 이것들을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정의 긍휼 신실"은 버렸던 것입니다. 23절의 "이것도"는 정의와 긍휼과 신실을 가리키며, "저것도"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주님은 더 중요한 것들을 강조하셨지만 우리에게 더 가벼운 것도 소홀히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님은 24절의 말씀을 제시하셨는데, 무엇이 하루살이이고 무엇이 약대입니까?
삼켰다고 해서 그들이 큰 재물을 꿀꺽 삼켰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하루살이는 그 경중에 있어서 우리에게 더 가벼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가리키며 약대는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인 "정의와 긍휼과 신실"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율법을 범하지 않기 위해 포도주에 떠다니는 하루살이를 걸러 마셨습니다. 하루살이는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여겨져서 먹지못하는 곤충이었습니다. 또한 약대도 부정한 짐승으로 먹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부피적으로 더 큰 부정한 짐승은 삼키고 더 작은 생물은 걸러낸다고 예수님이 풍자하신 것입니다.
참고로 아람어로 하루살이 grlma와 약대 gamla는 발음상 비슷하기에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24절 말씀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님은 "하나님은 食言치 아니하시며..."할때의 식언의 뜻을 아십니까? 말을 삼킨다는 뜻입니다. 말을 먹는다는 것은 자신이 한말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며 말을 뱉아놓고 취소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24절의 "삼킨다"는 표현은 무시한다는 표현입니다.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바쳐야 된다고 하면서 공의와 하나님의 대한 사랑(눅 11:24)<의와 인과 신>은 버려도 좋다는 태도입니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태도입니다.
왜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는가 하면 십일조는 눈에 보이는 일이므로 사람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의와 인과 신은 눈에 보이지 않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문제이므로 그들의 의를 치장하기에는 별도움이 안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복음과 빛이라는 곳에 실렸던 것입니다.
http://www.biblenara.org/gospel/gospel113-4.htm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소경된 인도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가리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고,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전보다 금을 더 귀중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을 어리석은 자요 소경들이라고 한탄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은 제단을 가리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고, 그 위에 있는 제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보다 그 위에 놓인 제물을 더 귀중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을 눈먼 소경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제단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은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이며, 성전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은 성전과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맹세는 지켜져야 하며, 따라서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맹세하지 말고 그 대신에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릇 것은 아니라고만 말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 화있을진저! 중요한 것은 버리고 경한 것은 강조하는 자여!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23).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 23:23-24)."
이제 거짓 지도자들에 대한 네 번째 저주 선언문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저주의 대상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네 번째 저주에서 주님은 그들이 사소한 규정과 전통에 민감하면서, 더 중요한 율법 정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박하(헤뒤오스몬)는 독특한 향내를 지닌 채소(mint)였습니다. 이 채소는 유월절에 쓴나물의 양념과(출 12:8), 회당의 방향제로 사용되었습니다. 회향(안네돈)은 미나리과의 식물로서 양념과(anise, dill) 약품과 향료로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근채(퀴미논)도 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향기로운 열매를 맺었으며, 그 열매는 양념이나 약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식물들은 이스라엘의 곡식이나 포도와 또는 감람유에 비해서 매우 수확이 적은 채소였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사소한 채소까지 철저하게 십일조를 구별해서 드렸습니다. 그들은 십엘조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준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서 가르치는 더 중요한 것들, 즉 의와 인과 신은 버렸습니다. 의와 인과 신은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습니다. 의(크리시스)는 재판, 옮음(right), 공의(justice), 의(righteousness)를 나타는 말로서, 본문에서의 '정당하고 공정한 행위", 또는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인(엘레오스)은 공동번역에서는 '자비'(mercy)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자비'는 이웃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피스티스)은 믿음, 신실함, 충성을 의미하는 말로서, 본문에서는 이 말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믿음과 신뢰, 또는 신실과 충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의와 자비와 신실함으로 대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십일조와 같은 문제는 사소한 점까지 준수하면서도, 더 중요한 의와 자비와 신실함에 대해서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버렸다"고 번역된 말은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십일조도 행해야 하지마, 의와 인과 신도 버리면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십일조 규례를 비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사소한 것에 치우쳐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무시하는 태도를 비판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공동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주님은 또 다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소경된 인도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고 있다"고 비난하셨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하루살이는 팔레스타인에서 흔한 곤충으로 가장 작은 것을 상징했습니다. 하루살이는 때로 포도주 통에 빠져죽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채를 가지고 포도주를 걸러서 사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살이를 부정한 곤충으로 취급했습니다. 반면에 약대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몸집이 큰 짐승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약대 역시 먹을 수 없는 부정한 동물로 취급했습니다(레 11: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루살이처럼 사소한 십일조 문제는 세밀하게 준수했지만, 약대처럼 크고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행하기 쉬운 일에 대해서만 생색을 내고, 지키기 어려운 일은 모른 척하면서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이글은 날마다 주님과라는 말씀묵상싸이트에 실린글입니다.
http://swim.org/sfc/2001/2/20.html본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십일조에 대한 의무는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잘 드렸을 뿐 아니라 아주 작은 양의 식물일지라도 그것의 십일조까지 드린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십일조를 잘 드리긴 했지만 십일조의 핵심 정신인 긍휼과 사랑과 신실함은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작은 일에는 굉장히 엄격하나 중요한 도덕은 무시함으로써 중대한 과오를 범하고 있는 이들을 주님은 질책하고 계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마23:23-24)
예수가 여기서 강조하신 요점은 올바른 영적 태도가 내재할 때에 외적행위는 결과적으로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와는 정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세부적인 형식을 지킬 때에 선한 마음이 생겨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성경통신교육원이라는 곳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bible.or.kr/adv1/m5_2.htm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마23:23-24)
예수가 여기서 강조하신 요점은 올바른 영적 태도가(의와 인과 신) 내재할 때에 외적행위(십일조)는 결과적으로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와는 정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세부적인 형식을 지킬 때에 선한 마음이 생겨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의성교회라는 곳에서 퍼온 글입니다.
http://www.euisung.net/azion/mt/mt23.htm2. 의와 인과 신을 버린 자들입니다.
본문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하였습니다. 이들은 생산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무로 알고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습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먹고 약대는 통채로 삼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수월하게 취급하고 지엽적인 문제는 중요하게 여기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공의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을 귀하게 여기며 믿음으로 행치 아니함이 죄가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법을 지키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여 서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며 용서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도 드리라고 하시지만(말 3:10) 공의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겸손히 주를 섬기는 것도 원하십니다(미 6:8). 그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감리교쪽에서도 이렇게 해석을 하는군요.
http://boozers.fortunecity.com/ship/222/0722.html예수님은 십일조와 같은 율법의 사소한 규례들을 철저히 지키면서 율법의 중심적 교훈은 무시하였던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지적하였습니다. 박하나 희양이나 근채는 모두 음식의 양념으로 사용하는 식물들로, 아주 소량을 수입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것에 이르기까지 십일조의 규례를 적용할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규례를 포용하는 율법의 근본 정신인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faithfulness)을 버렸기 때문에 주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생활은 마치 부정한 짐승을 먹지 않으려고 포도주에 섞여 있는 하루살이는 걸러 내면서도 약대는 통채로 삼켜 버리는 어리석은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십일조도 마땅히 행해야 할 규례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더 이상 인용한다는 것은 의미없는 일일것 같습니다.
님은 혹시 쉐마 말씀 연구회와 관련있는 분 아니십니까? 그쪽에서 님과 같은 식으로 말씀을 풀던데...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여러 주석좀 찾아보시고 비교검토하시는 태도도 현명할 거 같습니다.
님은 님의 성경해석이 그 어떤 영적 거인들보다 뛰어나고 한치의 오차도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제가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이 성경을 어떻게 풀어 놓았는지 정도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류와 자신의 독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믿고 싶은대로 믿어서는 안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