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계에 ‘제자 훈련’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습니다. 서울 강남의 모 교회당 그리고 네비게이토 선교회 등 일부 선교 단체들이 그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자 훈련의 유익이 아주 없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제법 흐르고 그 열매들의 실상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실망하거나 제자 훈련 자체에 회의를 갖는 경우도 가끔 관찰됩니다. 한 신학자는 “제자 훈련 열심히 하는데 왜 인격적 파산이 발생할까?”라는 다소 단정적인 제목의 글에서, 기존의 제자 훈련 프로그램들의 현황과 문제점을 분석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특히 한 유력한 제자 훈련 교재에, 교리적인 내용은 넘쳐나는데 성경이 가르치는 '덕성' 훈련 요소들이 너무 빈약한 것이 약점이라고 지적합니다.
아침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아래 세 가지 사례가 포함된 부분의 말씀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의 의미와 방법에 대한 본질적인 방면을 추구해 보았습니다.
누구든지 …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혼생명까지 미워하지 않는다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도 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눅 14:26-27, 33).
원칙적으로 제자는 스승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스승의 가르침은 물론 그가 추구하는 목표와 심지어 그의 인격과 삶까지 닮는 것을 포함합니다. 성경은 유일한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그분의 생명을 주심을 통해 그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마 23:8, 요 10:10, 마 16:18,). 그분은 이 목적을 위해 위 본문이 요구하는 삶을 친히 사셨고,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밀알들인 우리가 한 알의 밀이셨던 그분과 같은 형상을 갖게 하시려고 일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위 제자 훈련 교재를 만든 분의 아래의 말은, 훈련 목표 설정에서만큼은 성경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 훈련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신자의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이다.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살기를 원하는 신앙인으로 만드는 데 있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방법론에 있습니다. 즉 믿는 이들이 위와 같이 되려면, 먼저 그분의 이 땅에서의 삶과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 그분이 건축하시려는 몸인 교회의 의미, 그리고 실제적인 교회 건축의 길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 그러한 실재 안에 살도록 돕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쓴 서신서들에서 정확히 이 일을 했습니다.
그분의 삶을 본받음: 사도 바울은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이라고 말합니다(엡 4:20-21).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는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일생의 실지 상태”를 가리킵니다(각주 1). 즉 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의 기록들은 우리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그렇게 살도록 하나의 본을 세우신 것입니다(벧전 2:21).
저는 예전에 한 신실한 성경 교사가 주 예수님의 33년 반의 인간 생활을, 인성 안에서 신성을 표현하신 것이라고 요약한 것에 깊이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그분을 따르는 제자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가정과 직장과 그 외의 일상생활에서 그분의 신성한 속성을 살아 표현해야 마땅합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하나 됨: 바울은 또한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롬 6:6). 따라서 이처럼 이미 죽은 사람은 소위 서울 ‘강남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나 그들이 소유하고 누리는 삶을 공유하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땅에 속하고 세속적인 것인데, 이들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은 위에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골 3:1-3).
그분의 부활 안에 삶: 성경에서의 부활은 하나의 사건만이 아니라 한 인격이자 하나의 영역입니다(엡 2:6, 요 14:20 참조). 이 부활 영역이 곧 그분이 얻고자 하시는 교회의 실재입니다.
이러한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사는 구체적인 길에 대해 주님 앞에서 묵상할 때, 다음 두 가지가 제 안에 떠올랐습니다.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는 비결은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그분을 먹는 것입니다(요 6:57 하). 예를 들어, 그분처럼 “마음이 온유하고 겸허”해 지려면, 온유하고 겸허하신 그분을 먹어서 그러한 분이 우리 안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표현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경건에 이르는 훈련’입니다.
둘째, 계시록에서 일곱 교회를 일곱 도시와 일치시키고, 그 일곱 도시 각각에 오직 하나의 금등잔대만 말씀하신 것을 깊이 묵상하여, 바른 교회론을 정립해야 합니다(계 1:11-12, 20). 이러한 바른 교회론은 제자 훈련이 담임 목사를 위한 일꾼을 키우는 수단이라는 오해 혹은 그러한 시도 자체를 없앨 것입니다.
오 주님, 이 땅에서 당신의 삶을 다시 사는 당신의 많은 복사판들을 얻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