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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15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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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자기 십자가의 요구에 따라 영으로서 육신을 완전히 제압하여
산송장과 같이 죽은 상태가 되게 하여 이끌어 간다는 이 영적 사실에 대하여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과
또 이 사실을 자신이 충분히 확보하여야 한다.
동시에 이는 믿음의 세계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큰 획으로 말하자면 간단히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것이다.
이 큰 획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이다.(요일2:15-16)
이에서 좀더 세부적으로 들어보자면 시기 질투 교만 자랑 분쟁 등
이루다 말할 수 없는 인간의 육신적인 별별 죄악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성도인 우리도 이런 만가지 육신적인 것에서 그리 평탄치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늘 회개로 하루 하루를 또 새롭게 시작함에 있다.
이러한 반복적인 일상으로 평생을 다하는 가운데 날로날로 새로워진다고
고백하며 하는 신앙이 현대의 보편적인 정통신앙이다.
그러나 성경은 현대 보편적인 이러한 정통신앙을 정면으로 부인을 하고 있다.
즉 믿는 자는 믿는 그 순간 그때부터 주와 함께 모든 육신적인 것은
장사되었다고 선언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성경은 분명히 믿는 자를 향하여 더 이상 죄를 그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우리의 신앙현실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며 충분한
성화의 과정을 지나 영화의 직전에서야 가능한 것으로 알고 교리적으로
또 그리 소개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육체의 고난을 받으므로 해서 더 이상 죄를
그치게 하였으니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믿은 후의 삶이 충분히 그리될 수 있도록 하였다.(벧전4:1-2)
이러한 삶이 나에게 적용이 가능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함에서 가능한 것이다.(골1:24)
이것이 바로 신약성도의 본분이자 신앙의 구심점인 것이다.
현대기독교의 신앙적 위기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복음과 함께 하는 자신들을 위한 온갖 달라는 기도는 많아도 정작 성도의 핵심 본분인
주의 남은 고난을 저에게 충만히 채워 달라는 중심의 기도는 찾기 힘들뿐만 아니라
그렇게 가르치는 자도 찾아보기 힘든 시대이다.
심지어 주님도 믿는 자의 육체에 죄를 그치게 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므로 하여 순종을
배워 온전해 지신 분이시다.(히5:8)
믿는 자가 바로 이 고난에 드는 것이 최고 목적인데 반하여 이에 또
최고로 반대하는 것 역시 또 자기의 육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최상을 위하여 이에 최상으로 반대하는 육신을 영으로 완전히
거부하므로 최상의 믿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믿는 자의 구체적인 입장은 세상과 함께 자기 육신에 관련된 정욕을 좇는
그 모든 것을 실제로 완전히 포기할 때에 육신은 자기에게 완전한 거부의 대상이
되어지는 것으로 이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짊에 대한 실제 내용인 것이다.
이러함이 자신에게 이루어질 그때에 주의 참 평안의 충만함이 연속되는 한 가운데
안주하게 되며 비로소 성령의 이끄심대로 인도함을 받는 참 제자가 되어 지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죄가 자신에게 관여는 할지라도 더 이상 죄가 자신을 전혀 이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신앙의 정수요 자기 십자가의 정점인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