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13회 - 그분은 왜 오셨을까?
에세이
청지기 , 2021-01-15 , 조회수 (794)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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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도 그렇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성경을 보는 관점도 점점 더 깊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보통 이맘때면 많은 분들이 크리스마스를 떠올릴 때입니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 크리스마스 캐럴과 트리, 아기 예수가 등장하는 예수님 탄생 설교 등 …. 저도 주일 학교 때부터 경험했던 익숙한 풍경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에 읽었던, 인터넷에 올려진 한 크리스마스 설교는 제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장로교 합신 측 신학자요 목회자인 이분의 설교는 여느 것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요지는, 정통 교부였던 이레니우스가 믿는 이가 박해와 이단을 이길 수 있는 비결로, "그가 우리와 같이 되신 것은 우리가 그와 같이 되기 위함이다"라는 ‘성육신의 바른 의미’를 깨닫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 후 제가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요 10:10).

 

위 본문은 익히 아는 내용이고 새로울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아침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반복해서 읽을 때 제 마음에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처음에 이 부분을 읽을 때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묵상할 때,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과 관계가 있음이 깊이 느껴졌습니다. 주님도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요 6:38). 따라서 양들인 우리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것은 주님의 의도이기 이전에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경험에 비춰볼 때, 이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좀 더 깊은 추구가 필요합니다.

 

양들이 생명을 얻고”: 사도 요한의 글은 대부분 심오한 내용이 평이한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 읽을 때는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도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고, 생명을 얻는 것은 이 그리스도 자신이 죽음과 부활을 거쳐 우리 존재 안에, 구체적으로는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시는 것임을 확신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영접한 분은, 전후 문맥상 자기 땅에 오셨으나 거절당하셨던 바로 그 예수님 자신임이 분명합니다(요 1:11-12).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라는 말씀들로 확증할 수 있습니다(요일 5:12, 골 3:4, 1:27, 갈 2:20).

 

그런데 제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부분은 그리스도 자신과 성령과의 관계였습니다. 신학자들이나 복음 전파자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강조되나, 막상 위 ‘생명을 얻는’ 대목에 오면 불분명합니다. 대부분은 그리스도는 저 높은 하늘에 남아계시고 3격 성령만 우리에게 오신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생명으로 우리 안에 영접하는 것을 구조적으로 가로막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주님 앞에 가져갔었고, 결국 삼위일체 진리에 다소 오해가 있는 것이 원인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즉 삼위(성부, 성자, 성령)는 서로 안에 내주하심(페리코레시스)으로 각각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는 않으십니다(요 14:11). 구별은 유지하지만, 분리가 되지 않으심으로 한 위격이 계신 곳에 다른 두 위격도 함께 계십니다(요 8:29). 그런데 이것을 삼위가 구별도 되고 분리도 된다고 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육체가 되신 분은 아들이시지만, 그분 안에 “신격의 모든 충만”이 함께 거하십니다(골 2:9 원문 참조). 이것은 삼위 전체가 아들 안에서 육체를 입으신 것을 가리킵니다(보혜사 성령도 삼위 전체임). 이 마지막 아담이신 분이 죽음과 부활 후에 생명 주는 영으로 우리 안에 영접되신 것입니다(고전 15:45).  사도 바울은 이처럼 그 몸의 머리로는 하늘 보좌에 계시지만, 그 몸의 지체들 안에는 내주하는 생명으로 계신 그리스도를 만났고, 이 ‘한 새사람’ 계시는 그가 쓴 서신서들의 핵심 내용이 되었습니다(행 9:4-5).

 

더 풍성히 얻게 함”: 이것은 지금 우리 영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거처를 확대하시도록 우리의 마음인 양심, 생각, 감정, 의지에까지 모셔들이는 것을 말합니다(엡 3:17). 영어 KJV은 이것을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증가”(the increase of God)라고 했습니다(골 2:19).

 

한 신실한 성경 교사가 생명의 성장이 아닌 것과 생명의 성장인 것을 대비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은 위 말씀에 대한 저의 이해를 크게 도왔습니다. 그에 따르면, 생명의 성장은 ‘행위의 개선’, ‘경건의 표현’, ‘열심 있는 봉사’, ‘지식의 증가’, ‘은사가 많아지는 것’, ‘능력의 증가’가 아니며, 대신에 ‘하나님의 요소의 증가’, ‘그리스도의 신장의 증가’, ‘성령의 입지의 확장’, ‘사람의 요소가 감소되는 것’, ‘천연적인 생명의 파쇄’, ‘혼의 각 부분이 정복되는 것’입니다(WL, 생명의 인식, 2012, 284-295쪽).

 

위 본문 말씀을 누리면서, 주님 주님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하신 말씀이 제 안에 새롭게 조명되었습니다(마 7:21).

 

 

 

 

오 주 예수님,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우리 안에서 속히 이루소서!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게 하옵소서!


에세이,삼일 하나님,상호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