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서대문 경찰서 관할인 프랑스 대사관 경비대에서 군 복무를 했습니다. 그때 프랑스 사람들은 물을 사서 먹는다는 말을 듣고 너무 이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 고향 동네 한가운데로 흐르는 개울물은 가재가 살 정도로 맑아서, 아이들과 신나게 놀다가 목이 마르면 개울가로 뛰어가, 코를 박고 엎드려 양껏 마시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조금 흐른 후에, 하루는 근무하던 음료 회사에서 생수 공장 지을 부지를 물색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도 역시 물을 돈 주고 사 먹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물을 사 마시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건강을 생각하는 분들은 탄산음료는 물론 심지어 과즙 음료보다도 생수를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자기들을 위해 저수조들을 팠는데
그것들은 물을 담아 둘 수 없는 새는 저수조들이었다(렘 2:13).
요즘 교회에서 예레미야서를 함께 추구하고 있는데, 아침에 묵상한 위 본문은 우리 믿음 생활의 근본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특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서 버림받으신 심정을 토로하는 대목과 자신을 생수의 원천으로 소개하신 부분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버림받으신 여호와: 요즘에는 일종의 버림받음에 해당하는 왕따를 당하거나 가정이 깨져 부부 중 어느 한쪽이 고통받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끼리는 다른 쪽을 버리거나 버려지기도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는 이 경우는 참 특별합니다. 만일 제가 하나님으로서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깨끗이 털어버리고 다른 대안을 찾거나 소유한 절대 권위로 혼을 내어 잘못했다고 싹싹 빌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 … 나를 저버렸다.’(렘 2:13, 17, 19), ‘그들이 내게서 등을 돌리고는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27),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니 더 이상 주께로 가지 않겠습니다.’ 한다.’(31절), ‘내 백성은 수도 없이 여러 날 동안 나를 잊어버렸다.’(32절), ‘너 어찌하여 그처럼 자주 돌아다니며 네 길을 바꾸느냐?’(36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부모에게 마음을 닫은 채 이런저런 일로 속을 썩이는 사춘기의 자녀를 대하는 모습 같습니다. 비록 버림을 당하셨지만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사랑하시고, 정신 차리고 돌아오기만을 바라시는 그분의 안타까워하시는 심정이 느껴졌습니다.
생수의 원천이신 여호와: 우리는 여호와를 창조주나 구속주로 소개하는 말씀에는 익숙합니다. 여호와는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안식과 평강을 주시는 분이라고 해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위 본문처럼 여호와께서 ‘나는 물(생수의 원천)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흔치 않은 표현입니다. 왜 그분을 물로 마시지 않는 것이 악한 것인지, 이 물에는 무엇이 녹아 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마시는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아래 내용은 그 간략한 요약입니다.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는 길을 저버림: 예레미아는 타락한 우리의 마음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치유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렘 17:9).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치유가 불가능한 우리 마음에 그분의 법(사실상 삼일 하나님 자신)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렘 31:33). 이러한 새 언약의 내용들은 압축하면 사탄의 본성을 표현하던 우리를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마치 먹물에 흠뻑 젖은 종이를 금물을 들인 종이로 바꾸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세상 교육이나 윤리 도덕이나 종교적인 묵상과 수행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오직 그분 자신이 생수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타락한 옛 성분을 씻어 깨끗하게 하고, 그분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우리 안에 지속적으로 분배하시는 과정으로만 가능합니다(엡 5:26, 요 10:10).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든 그분을 생수로 마시기를 거부한다면, 이런 길이 막히게 되고 하나님의 뜻의 성취는 지연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점이 그분 보시기에는 악한 것입니다.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 자신을 마심: 창조주나 구속주는 사람 밖에 계셔도 문제가 없지만,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오셔야 우리가 참으로 물을 마신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은 후에 ‘모두 한 영을 마시게 되었다’고 합니다(고전 12:13). 보통은 여기의 영을 제3 격 성령으로 생각하나, 사실 이 물은 성부도 포함된 삼위 전체이십니다(고후 13:14). 더 나아가 이 물 안에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인성과 그분이 거치신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요 7:39). 이 물은 모든 긍정적인 것들이 다 들어 있는 만유를 포함한 물인 셈입니다. 우리는 이 물을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마실 수 있고, “그분께서 하신 일을 여러 백성 가운데 알리고” “여호와를 찬송”함으로 마실 수 있습니다(사 12:3-6).
위 본문을 묵상하면서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격언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마음이 다른 대치물에 홀려 그분이 생수의 원천이심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마시지는 않을 가능성은 너무 많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탄식과 경고와 호소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함을 느낍니다.
오 주 하나님, 우리 모두가 매 순간 당신께로 돌이키게 하시고, 당신을 생수로 마시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