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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11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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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환님의 글에 보충하여...
1. 십자가와 자기부인 중요합니다.
2. 아래 더 보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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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변호와 확증에서 ( 퍼온글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렇게 고상한 표현은 아니지만 한국교계내의 어떤 분위기는 이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여기서 어떤 분위기란 믿음생활에서 (생명의 표현인) 행위를 강조하거나 구원과 관련하여 성도들의 동역을 언급했다가는 가차없이 이단으로 단죄하는 현실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전문 이단연구가를 자처하는 이대복 목사님은 기독교영성운동본부 대표인 박철수 목사님이 쓴 '변화되는 삶을 경험하라'는 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은 구원을 이뤄 가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트집 잡아, 이것을 믿음의 구원을 부정하는 행위신앙이고 이단요소라고 정죄했습니다(월간 교회와이단, 98.10월호).
저는 박 목사님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위 표현이 이단요소는커녕 성도들의 변화와 직결된 성경본문내용(빌 2;12)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사는 믿음의 행위', '생명의 성장 또는 믿는 이의 변화'와 관련된 성경말씀에 무지하여 이것을 이단사상으로 배척하는 작금의 한국교계 분위기가 '성도들의 성경적 행위'마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뒤뚱거리게 만드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다음에 보겠지만, 성경은 물론 장로교 신학에도 무지하고,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개념, 믿음의 행위 개념에 대해서도 무지한 결과입니다.
1. 이단전문가들과는 달리 정통신학자들은 '믿음의 행위'를 배척하지 않습니다.
1) 장로교 정통 신학자들의 태도 : '행위'라는 말만 나오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부 이단전문가들(?)과는 달리 장로교 정통신학자들은 구원 또는 성도들의 생활과 관련한 성도들의 '인격적인 반응'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존 캘빈은 그가 작성한 제네바 요리문답 126번에서 '우리가 선한 일들을 행함이 없이 의롭게 만드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장 2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진 선행들은 생명 있는 신앙의 열매요 또한 증표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정훈택 교수(총신대)님은 '하나님의 구원도 행위를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필수적인 것, 하나님의 뜻을 승화시키고 천국의 떼어낼 수 없는 한 요소로 모두에게 강요하고 있다(마 7:21)'라고 말합니다(하나님나라와 교회, 생명의 말씀사, 1993, 40쪽). 박형룡 박사도 '진정한 신앙은 선행에서 그 자체를 나타낼 것이니 선행은 사람들 앞에 이 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의 생명의 의에 대해 증언할 것이다. 의인의 행함에 의한 칭의는 신앙에 의한 칭의를 굳게 한다'고 말합니다(조직신학 제5권 구원론, 1972, 294쪽). 이대복 목사 눈에는 이분들도 이단이 되겠지요.
2) 한국교회들은 이미 자신들이 가진 교리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정훈택 교수는 '한국보수주의 교회들이 신학이론으로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깊은 기독교적 진리를 받아들였고, 이것이 구원론적 의의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교리를 미처 소화하지는 못해서 주어진 현실 속에서 이것을 바로 적용하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합니다(신학지남 229, 1991년, 63쪽).
김영재 교수도 같은 의견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살아 움직이지 못하고 불신사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교회도, 그 교회를 구성하는 개체인 성도들도 그리스도께서 위임하신 책임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실천이 없는 정도가 아니고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가 없다"'(신학지남 207호, 1985, 겨울호, 15쪽).
정훈택 교수는 '교회란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명실공히 예수의 순수한 몸이 되어간다... 행위와 믿음 사이의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한다면... 이 문제점은 한국교회에 아주 근본적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고 말합니다(위 신학지남 229호,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1), 72쪽).
결론적으로, 성도들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러한 '성도들의 의로운 생활'의 문제를 성경에 무지한 일부 이단연구가들의 손이나 신학교리집에 묶어 둘 때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이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과 하나님의 갈망을 아는 분들이 성도들을 그러한 말씀의 실행 안으로 이끌어 살아있는 예수의 증거(계 1:2, 9, 12:17, 19:10, 20:4)들이 한국 땅 각 처에서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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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성도들이 주님을 생명으로 영접하여 거듭난 후 옛사람인 육체의 요구를 거절하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갈 2:20, 5:16, 빌 1:21).
이러한 '새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이며 이것은 생명의 성장, 혼의 구원 심지어 주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과도 직결된 것입니다. 사실 신약의 서신서들을 자세히 보시면 상당부분이 성도들이 주님자신에 의해 '어떤 행위를 할 것' 또는 '어떤 행위는 하지 말 것'을 명령하는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갈 5:16, 26).
물론 이 때 그리스도는 없는 육체의 행위는 회심 전의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그것이 외견상 선해 보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처럼 보여도 하나님 눈엔 가치가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참된 일에 방해만 될 뿐이라는 사실을 바로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빌 3:3-6, 롬 10:3).
요즘의 한국교계 일부에서는 '오직 믿음'만 강조하여 행함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거나, 반대로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집회, 병원 또는 고아원 방문 등의 '행함'에서 신앙의 열매를 찾으려는 노력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제 사견이긴 합니다만, 정작 자신을 깊이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아낸 '믿음의 행위'(살전 1:3원문, 갈 2:20)는 많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 원인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1. 한국교계가 행위를 경시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은 '행위' 또는 '공로구원'을 강조하며 성경에서 빗나간 천주교에 대해 '오직 믿음'을 외치며 반기를 든 혁명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때 천주교의 영향아래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는 고행을 통해 의롭게된다고 착각했던 말틴 루터가 '행위'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롬 1:17을 근거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외쳤고, 이러한 '자기 교리'를 근거로 믿음의 행위로도 의롭게 된다는 '성경말씀'(약 2:24)을 무시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 진리를 균형있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처럼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사는 것인 '행함의 의'를 경시하는 풍조가 한국 땅에 복음이 전래될 때 특수한 한국의 풍토에 의해 더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이 땅위 생활' 에서 '좋은 행위'를 강조하는 유교와 차별되도록 '나중 천국' '오직 믿음'을 외쳤던 것입니다. 총신대학 정훈택 교수는 이러한 한국교계의 잘못된 전통을 그의 논문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1)'를 통해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신학 지남 229호, 1991, 57-88쪽).
정 교수님은 위 논문에서 한국교계가 '행함의 의'를 경시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최근에 깨닫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다음에 보듯이 정작 '믿음의 행위'를 살게 하는 핵심진리가 가려져 있어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 '믿음의 행위'를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심' 진리가 닫혀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과 비 그리스도인들의 구제와 선행 등 사회에 대한 기여는 나타난 결과는 같더라도 그 본질은 달라야 합니다. 즉 전자는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아낸 결과(빌 1:21)인 반면, 후자는 자신의 선한 행위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앞의 것은 새사람의 행위요 뒤는 옛사람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사는 것에 대해 무지하여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자기 과시에서 나온 선행을 일삼는다면 비 그리스도인들과의 차이점은 없게됩니다. 이것은 바울의 지적처럼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썩어질 '자기 의'를 세울 뿐입니다(롬 10:3).
많은 분들이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 일뿐이다'는 양자교리, '삼위 하나님이 구별되실 뿐 아니라 분리되기까지 한다'는 잘못된 삼위일체관의 영향으로 하나님 자신인 그 영이 우리 영 안에 들어오신 '거듭남 개념'에 있어 분명치 않습니다. 이처럼 첫 출발이 분명치 않을 때 '주님 자신'이 자기 안에 사시므로 일상 생활에서 자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아야 한다는 현실인식과 실행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승천하신 예수님과 생명으로 성도들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 부활한 주님과 성령님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는데 핵심구절인 요 7:39, 고전 15:45에 대한 진리가 한국교계 내에서도 열려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삼위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고 상호내재 하신다는 바른 삼위일체관을 가질 때 가능할 것입니다.
3. 사람의 혼과 영을 구분해야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 수 있는 기초를 갖게 됩니다.
사실 복잡한 신학지식은 없어도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내주를 확신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확신이 있는 분들조차도 일상생활 가운데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좇는 실제적인 길(마 16:24)을 몰라 금식, 기도원, 부흥회, 능력의 종들이 있다는 예배당을 전전하며 방황하십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제시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 영을 좇아 행함으로 육신의 욕심을 거절함'으로 그리스도를 살고 그분의 몸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더 구체적인 길은 순간순간 사람의 혼의 중심인 '생각'을 영이신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사람의 영'에 두는 것입니다(갈 5:16, 25, 고전 6:17, 롬 8:6). 신실한 성도들의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밖의 의의 행동은 이러한 '영에 둔 생각'의 결과입니다. 또한 이러한 실제적인 삶은 날마다 참 양식이신 주님자신을 먹음으로 가능합니다(요 6:57).
이처럼 타락한 혼 즉 '옛 나'가 매일 부인되고, 새롭게 변화된 혼 즉 '새 나'가 우리 영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를 의로 여기십니다(약 2:24, 고후 5:21).
그런데, 사람의 영과 혼을 하나로 묶어 생각하는 '이분설'로는 이러한 '믿음의 행위'의 기초인 영에 둔 생각을 말하는 로마서 8장 6절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혼에 속한 부분인 생각이 사람의 육과 사람의 영 사이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생각이 사람의 영(슥 12:1)과 항상 하나라면 위 롬 8:6은 모순된 말씀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물론 진리적으로 이 점이 분명해도 막상 그러한 '믿음의 행위'를 살 것인지 말 것인지는 여전히 각 사람의 주님을 사랑하는 정도와 헌신의 정도에 달려있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진리에 대한 빛이 있어야 그 길을 신실하게 갈 수 있다는 것을 성경과 주님을 참되게 아는 분들은 양심가운데 인정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