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사함과 영혼의 구원
성경진리토론방
, 2003-09-13 , 조회수 (413) , 추천 (0) , 스크랩 (0)
우리의 구원은 무엇으로부터 구원되어야 할까?

영혼의 구원과 관련지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그 영혼이 이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악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는 달리 내면의 악은 그대로인 채 이미 범한 죄와 그것에 따르는 형벌을 어떤 특수한 방법으로 제거해 주는 그런 기적 같은 사면을 고대하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구원이란 오랜 신앙 여정을 거치는 동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에 빠져 있던 삶에서 돌이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을 즐거워하는 상태로 우리 영혼의 성품이 변화되어진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형성된 영혼의 성품은 저 세상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사람 내면에 형성되는 신앙의 질이라는 것은 그의 의지와 이해성에 끊임없이 찾아오는 악이나 거짓된 사상과의 싸움을 통해서 아주 조금씩 변화되기에 이는 어느 한 순간 혹은 짧은 시간 안에 급조되지 아니하고 전 생애를 망라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우리 주위에서 갑작스런 영혼 변화의 물결을 타시는 분을 보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조차 저 길고 긴 인생 여정에 비추어보면 한 시점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요. 구원은 육신의 생명이 끝나는 그 날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야 할 인생의 최대과제일 것입니다.

사람의 성품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그 영혼의 질이 어떠한가와 같습니다. 영혼의 형상은 사람 자신이 본질적으로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애정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때까지 그 영혼에 형성된 수많은 애정들 중에 가장 으뜸이 되는 지배적인 애정이 곧 그 사람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비록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르고 또 한 가지 일을 수행할 때에도 그 일을 하는 동기와 목적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심사를 지닐 수도 있기에 어떤 것이 그 사람의 진정한 마음인가를 가리기는 힘들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이 어떻다는 것은 영혼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형성되어진 그 사람의 지배적인 애정만큼은 변하지 않고 저 세계로까지 영원히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 삶 안에서 우리 영혼의 지배적인 애정이 악에서 떠나 선한 형상을 갖추지 못하였다면 그 영혼은 사후에도 자신의 악한 애정에서 나온 그대로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이미 굳어진 그의 지배적 애정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는 그의 생명, 곧 그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빼앗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그의 사후에 이 세상에서와 같이 더는 가르쳐서 다시 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한 인간이 지옥에 처하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살 때 지은 죄 때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한 형벌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악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에게 벌을 주거나 해를 가하는 일을 조금도 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천국의 빛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지옥을 향하는데 이는 거기 지옥적인 환경이 오히려 그 영혼의 성품에 적합하여 안락함과 자유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각들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미 지은 죄와 그것으로부터 받게 될 형벌이 사면되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에 형성된 성품이 어떠한가의 문제입니다. 영혼의 구원과 관련지은 죄 사함이란 영혼이 자기 악과의 투쟁을 통하여 이를 극복하고 주님과 이웃 사랑의 선한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할 뿐이지요. 물론 이 모든 변화는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자명합니다.

성경에서 죄를 사함 받는다는 의미는 '이제 네 죄가 없어졌노라!' 라는 식의 선언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마음의 변화를 가리키는데 죄를 사함 받았다면 적어도 이전과는 달리 죄에 대한 유혹을 견뎌낼 힘이 생성되어 그만큼 내적 상태가 정결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사함이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면 내면의 악은 이전의 지옥적 상태 그대로이면서 다만 그리스도의 피를 믿었다는 이유와 또 자신이 범한 죄를 자백했다는 이유 등으로 그 죄가 제거되었고 나아가 구원에 이르렀다고 이 모두를 주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일을 진실한 신앙인양 간주하기도 합니다.

현 기독교의 구원관은 죄를 향하여 마음이 무능력하게 끌려가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은 등한시한 채 죄의 형벌로부터의 사면에 대한 구원만을 부르짖고 있어 이러한 구원관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죄 그 자체는 하나님에 반하는 악한 것이기에 죄를 범하는 것으로부터 영혼이 벗어나게 되는 이런 구원은 참 구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고 연약하기에 이러한 인간에게 죄는 어쩔 수 없이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명목 하에 오직 유일한 방법은 그 죄로 인해 받게 될 두려운 결과들을 피하는 것에서 구원의 본질을 찾는 것은 잘못이라 봅니다. 마음 속에 죄를 범하고 싶은 욕망은 그대로인 채 그 형벌만을 면하게 하여주는 것이 구원이라면 그것이 어찌 온전한 죄로부터의 구원이겠는지요!

구원의 본질은 우리 마음이 새롭게 지음을 받는 것에 있을진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어주시고자 하는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지옥 갈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을 믿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런 식의 결과적인 것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과거 죄에 끌려가기만 하던 우리의 의지와 이해성이 이제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되는 상태로부터 건설됩니다. 그것은 악을 떨치고 선을 사랑하며 거짓에 눈감고 진리에 눈이 뜨이는 이 모든 능력이 실제 이 땅 위에서 자연스럽게 삶으로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새 의지를 받아 이전의 악을 끊고 주님의 계명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 행하는 이러한 본질적 구원은 없이 그저 그분의 피 흘리심의 대속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식의 생각들 또 그 앞에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그 죄가 제거되었다는 생각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에 관한 한 정작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지옥이나 그 형벌의 고통과 불행으로부터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 모든 지옥적인 것들을 초래하는 우리의 악한 마음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에 악이 이전처럼 가득 차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것은 오히려 저주에 속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이치로 죄를 짓고 난 후의 마음 상태가 죄를 짓기 전에 비해 전혀 변화의 조짐이 없어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죄들을 자백하는 순간 그것들이 도말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면 무엇할 것인가요. 이 모든 잘못된 생각들은 우리가 성경의 깊은 뜻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문자적 의미만을 해석함으로 성경을 너무 가볍게 읽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장의 이 말씀을 예로 들면 우리가 죄를 자백한다는 글자의 의미는 그저 주님 대속의 피를 의지해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면 주님께서 그 죄를 없던 것으로 해주시겠다는 그런 의미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일은 그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난 진실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곧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한 상태에까지 마음이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자백은 주님께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마음의 진심이 실리지 않은 입술만의 고백에 불과할 뿐인데 그런 예배를 주님께 드리면서 그것이 주님께서 대신 흘리신 피 때문에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성경을 읽는 눈 : http://column.daum.net/n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