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594§ion=section56 성직자와 평신도 구분은 비성경적이다
목회자는 섬김받는 이가 아니라 섬기는 이다.
김삼 기자
어디한번 솔직히 털어놓고 얘기해보자. 성직자(clergy)와 평신도(laity)의 구분이 신약 성경에 단 한번이라도 비쳐진 적이 있던가. 본 기자도 목사지만, 만일 목회자만 성직이라면 장로나 집사는 세속직이란 말인가? 장로나 집사도 엄연히 성직 즉 거룩한 직책들이며, 더구나 신약에서는 목사도 장로였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이미 복음주의교회에서는 제쳐놓은 지 오래된, 케케묵고 한물간 개념이다. 주로, 여태껏 전통을 끼고 사랑하는 개신교 주류교단에서 즐겨 쓰는 말들이다. 복음주의교회에서는 대신 서로 '형제', '자매'란 말을 선호한다. 그 점에서 더욱 복음적이다. 미국의 많은 교인들이 '김 목사'보다 '브라더 킴'(김 형제님)이란 말을 좋아한다. 더 정답고 근접도가 높다. 심지어 공식석상에서 자기 담임목사의 맨 이름(퍼스트네임)을 그냥 부르기도 한다. 언뜻 버릇없어 보여도 더욱 친근한 화법이다. 그러다 보면 하나되자고 하기도 전에 어느새 하나가 되어있다. 껴안고 입맞춰도 하등 부담이 안 간다. 거기가 천국이다.
물론 동서양 사고방식의 차이도 인정한다. 하지만, 신약성경에 흔해빠진 말이 '형제'요 '자매'다. 왜 흔한 말을 안 쓰고 일부러 어려운 명칭을 써가며 호칭 때문에 피차 불필요하게 마음쓸 필요가 있을까. 언제부터 우리는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소릴 듣기를 그리도 좋아하게 됐나? 그러다 보니 교회나 교계에만 들어오면 은연중 계급의식이 작용한다.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명칭 하나로 남과 차별화 된다. 그것이 그렇게도 자부심을 높여주는가. 그래서 그런지 수시로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을 소모해가면서 갖는 집사, 장로 임직식이 진급식 못지 않다. 하지만 바울은 베드로를 게바라고 그냥 불렀다. '게바 사도님', '요한 장로님', '스데반 집사님'이라고 거추장스럽게 직분명으로 겉치레하면서 호칭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김삼님'으로 족한 것이다.
스탕달의 소설 '적(赤)과 흑(黑)'에서 적은 성직자, 흑은 세속법관을 암시한다고 한다. 카톨릭 적 사고방식이다. '적'은 붉은 옷과 어두관(魚頭冠)으로 치장하기 좋아하는 사제계급이다.
성직자란 말은 사실 사제나 목사가 대접받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 아니던가. 하지만 목사가 이 명칭으로 짐짓 사잇선을 그어놓고 스스로 앞가림 하려든다면, 행동이 거룩하지 못할 때 이미 성직자란 명칭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무턱대고 갖다 붙이는 '성직자'란 세 글자에 책임져야 할 소지는 없는가.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다 성도다. 믿는 그 자리에서, 거듭난 즉시로 성도 즉 거룩한 이라는 명칭과 개념을 성령님으로부터 부여받는다. 그렇다면 성도와 성직자의 구분은 무엇인가? 거룩한 무리와 거룩한 직분자의 차이인가? 목사도 성도 가운데 있다. 목사도 성도가 아닌가.
'성직자'란 말은 쓰면 쓸수록 묘한 개념의 혼동만을 안겨 줄뿐이다.
정확하게 말해보겠다. 목회자(minister)는 사실 성도를 섬기는 자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주님은 죄인을 섬기러 땅에 내려오셨고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 목사가 어찌 그 이상을 바란단 말인가? 주님보다 더 대접받겠단 말인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던 물대야 속 물표면 위에 비친 땀방울 맺힌 주님의 섬김의 얼굴-그 이상을 넘어가서는, 섬기는 자가 되지 못한다.
딴 소리지만, 카톨릭은 소위 '성인'(saints)이란 개념을 따로 창출해 쓴다. 적당한 시간간격을 두고 매번 추대해 받든다. 심지어 어떤 특정성인을 '수호성인'으로 받들고 기도하고 중보해 달라고 요청도 한다. 도대체 어느 도깨비가 성인이란 말인가? 성인은 우리가 성인이다! 예수 믿고 거듭난 우리 모두가 성자(聖者)들이요 성인들, 성도들이다. 그런데도 만성절입네, 축성절입네 귀신 씨 낱알 까먹는 소리들을 해댄다. 성경대로 하면, 성 프란시스 못지 않게 '성 김삼'인 것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개념구분은 다분히 구약적이다. 코라(고라)의 반역이후 사제지파인 레위족들을 다른 지파 형제들과 사이에 거리를 두고 구별짓던 관습이 카톨릭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으로 둔갑한 것이다.
카톨릭은 그럴 만도 한 것이 당시 신학교와 수도원에서 수련과 연구에 골몰하던 사제들과 훗날 유럽전체를 뒤흔들기까지 콧대높던 교황권과, 세속 왕을 비롯한 일반인들을 철저히 구분하기 위해 그런 제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상징이라도 하듯 대부분의 수도원과 구식 성당을 보면 벽이 높고 창문들은 위쪽에 붙어있다. 세속으로부터 자체를 차별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과도 담을 쌓게 됐다. 대조적으로 주님은 늘 자연을 가까이 하셨다. 드높은 담장과 두터운 벽 너머 수도원에 맨 날 처박혀 그리스어, 라틴어교육을 받고 신학 전문가가 된 그들과 라틴어를 제대로 못 알아듣는 일반인들이 어떻게 구분이 돼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경은 자기네 전유물인 양 끼고 있으면서 일반인들을 무식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유식한 자기네와 무식한 그들을 구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두텁고 드높은 담벼락 너머 저편을 귀족화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성직자'란 명칭에서는 거룩하고 구별된 느낌보다는 귀족적인 냄새가 더 난다. 차별화, 계급화 된 생경한 체취가 더 풍긴다. 목회자나 교인이나 똑같은 인간인데도 별종인 것처럼 느껴짐은 기자의 오산일까?
개신교가 이 구분과 차별화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잘못이다. 개신교가 신학교를 운영하니 역시 그럴만하다손 치더라도 명칭은 달라야 한다. 신학계를 구분하자면, 신학생, 신학도나 신학자와 신학계로 족하다. 신학교 출신이고 안수 받았다 해서 성직자라고, 신학교 출신이 아니라 해서 평신도라고 구분 지을 하등의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목회자는 별다른 소명이 있어야 하고 다년간 특별한 수련을 받아야 함은 사실이다. 목사는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서 맨 날 사회에서 세속 일을 주로 해야 하는 일반교인들과 다를 수 있다. 그렇다해서 구태여 성직자란 명칭으로 앞가림하려 들고 스스로 높일 순 없다. 성경은 장로들을 존경하되 잘 가르치는 장로들(목회자)을 배나 존중하라고 했다. 결국 그 차이인 것이다. 목사는 구약적 개념의 사제도 제사장도 아니다. 베드로는 온 성도가 곧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했다. 성도 모두가 곧 천국 귀족이요 왕족이요 사제들인 것이다.
덧붙이지만, 교우들은 '평신도'란 말로 자신을 '성직자'와 구태여 구분 지을 필요가 없다. 그런 개념과 용어가 필요하다면 '목회자', '일반교우'들로 충분하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또 장로들이 섬김에 앞장선다. 바구니 들고 헌금 나르기, 안내하기, 장애교우 돌보기 등 거친 일, 뒷일들을 장로들이 도맡아한다. 강단 가까이 높은 의자에 앉아 잰 체 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단 행정 치리만은 사역자와 장로들이 중심이 된다.
하늘 보좌 앞에는 24장로석 외에 목사자리가 따로 없다. 성직자 좌석과 평신도 좌석이 구분돼 있지도 않다. 누가 성직 곧 거룩한 직분자인가? 모든 교회 직책들이 다 성직이다. 누가 성도인가? 거듭난 너와 내가 다 성도다. 서로 섬기는 이들, 그들이 곧 성도요 교회다. 이 평등원리부터 교회에 적용되지 않으면, 교회개혁은 한참 뒷걸음질일 수도 있다. 이제부터라도 성경을 본받아, 가급적 '김 형제님', '이 자매님'으로 서로를 호칭하면 어떨까? '김 목사님', '박 권사님', '이 장로님' 대신 말이다.
기사입력시간 : 2003년 05월31일 [07:14] ⓒ news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