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www.kyeyak.ac.kr/kyeyak6/m6_2.html송용조/ 양의문교회 목사
성직자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
성직자의 역할에 대한 혼동은 어제오늘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에 쓰여진 허클베리핀의 모험(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이라는 책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허클베리핀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성직자의 역할에 대한 혼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헉은 요안나에게 세필드에 있는 그녀의 삼촌이 다니는 교회에는 열일곱 명의 성직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같은 날 다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한 명만이 설교한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요안나는 그렇다면 나머지 성직자들은 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 별일 안 해 그저 빈둥거리고, 밥이나 먹고, 이런 저런 일들을 하지. 하지만 그들은 주 로 아무 일도 안 해."하고 헉이 대답했다.
헉의 말을 들은 요안나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서 물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왜 있는 거야?" "그 사람들은 그냥 모양으로 있는 거야, 너는 그것도 모르니?"라고 헉은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성직자들이 별로 하는 일없이 밥이나 축내면서 빈둥거리는 자들로 보여지는 것 같다. 이러한 시각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 상태는 그 교회 목회자들의 인격과 사역의 질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성직(聖職)에 대한 바른 이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교회 개혁은 목회자가 개혁될 때에만 가능하다. 목회자들이 성직자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때 교인들은 분명 변화될 것이다.
요즈음 교회도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들려지고 있다. 목사들의 목회 사역의 갱신 없이는 교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되거나 또 향상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 개혁과 갱신의 시작이 성직에 대한 바른 이해에 기초하지 못한다면 그 갱신과 개혁 결과는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목회자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성직관(聖職觀)과 평신도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성직관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함은 물론 잘못된 생각을 고치려고 노력할 때 좋은 결과가 나을 것이다.
바른 성직관에 기초하여 목회자들이 그들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기만 한다면 교인들의 영적 상태는 크게 변화되고 향상될 것이다. 모든 교회의 향상과 쇠퇴는 그 교회의 목사들의 향상과 쇠퇴에 달려있다.
목사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
요즘 신학대학에 입학하려는 지원자들의 수가 많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안수 받은 성직자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고 신학교에 입학하려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이미 신학교를 졸업하여 안수 받고 목회하고 있으면서도 안수 받은 성직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성직의 역할을 올바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는 사람, 상담가, 교회를 경영하는 행정가, 교회의 사명에 관계된 여러 가지 일들을 추진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직자들 자신도 성직자의 사역에 대해 각기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목사란 비전을 가지고 분명한 목표와 계획을 세워 교인들로 하여금 그 목표와 계획에 참여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확신에 차있으며, 교인들의 불평과 불만을 못들은 체 한다. 교인들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그 목표에 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목사란 교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요구와 불만 사항을 듣고 그것을 해결하고 교인들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들이 쟁점화 되는 것을 막는 것이 목사가 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한번은 강의 시간에 신학생들에게 "여러분들의 눈에는 성직자들이 어떻게 비쳐지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뷔페 식당에 부지런히 다니는 사람, 잘난 체 하는 사람, 말이 많은 사람 등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학생들이 많았다. 여기서도 성직자의 역할에 대한 혼동된 시각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제사장이며, 그리스도의 증인이며, 복음 전도자들이며, 교회의 사역자이기 때문에 안수 받은 성직자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직자들이 없다면 교회는 더 건전한 상태로 발전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성경적 근거에서 보거나, 실용적 근거에서 볼 때 성직자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성직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서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교회의 모든 사역이 전적으로 성직자들에게 맡겨지는 것이나, 평신도들의 손에 사역의 고삐가 전적으로 쥐어지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성직자들에게 다 맡겨지게 되면 성직자들이 쇠약해질 수밖에 없고, 평신도들에게 다 맡겨지는 경우에는 평신도들이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 역사는 성직자들이 평신도를 지배한 교권주의와, 평신도들이 성직자들을 무시하는 반교권주의라는 양극단 사이를 오고 갔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이 두 경향 모두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성직자들이 평신도 위에 군림하는 것이나, 평신도들이 성직자들을 경멸하는 것은 둘 다 비성경적인 태도이다.
성직자들에게는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했다. 평신도들에게는 지도자를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라고 했다.
목사는 제사장이다
성직자의 사역을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향한 것으로 볼 때 그것은 제사장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향해 사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직자의 사역이 일차적으로 교회를 향한 것으로 볼 때 그것은 목자적인 것이다. 이는 목자이신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는 성직자들을 성찬식의 희생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로 인식한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이런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은 목회자를 제사장으로 부르지 않으며, 성찬식을 희생제사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들로 부르고 있다(벧전 2:2,9).
여기서 말하고 있는 '제사'는 교회의 예배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상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연구이다. 신약 성경은 성직자 집단에 대해서는 '제사장들'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은 성직자들을 영혼의 감독, 목자, 교사,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사자 등으로 부르고 있지만 제사장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을 제사 의식을 수행하는 제사장들로 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신약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양(백성)들을 이끌고 먹이는 목자(목사)이다.
16세기 영국 국교회를 포함한 일부 종교개혁가들이 그들의 사역자들을 지칭할 때 성직자를 제사장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인 '프리스트'(Priest)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들은 이 프리스트라는 말을 '제사장'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장로'를 의미하는 '프레스비테로스' (presbyteros)교의 단축형으로 사용했다.
당시에는 '목사' (Pastor)라는 말이 아직 일반적으로 쓰이는 호칭이 아니었기 때문에 프리스트라는 말이 제사장이라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목사라는 의미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프리스트(Priest)라는 말을 아예 없애 버리는 것이 신학적 명료성과 성경적 충실함 모두에 기여할 것이라는 주장을 듣게 된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어떤 이들은 성직의 개념에 '제사장' 이라는 성직의 특성이 회복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비록 신약에서 성직자들을 제사장들로 부른 적이 전혀 없지만, 성직에 임명받은 목사들을 제사장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안수 받은 성직자들을 제사장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논란은 상당한 혼란을 일으키고있음이 사실이다.
우리가 성직자들을 제사장들로 부를 때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대속사역이 완료된 뒤에는 더 이상 속지를 위한 희생제사는 드려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며, '예배' 라는 신령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성직자들이 하는 어떤 사역 곧 구약 시대처럼 제사장들과 일반 백성들로 완전히 구별되어 제사장들에게만 속하는 것 같은 일은 없다.
오늘날 목사들이 교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것도 목사들만의 고유한 사역은 아니다. 교인들도 서로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도 목사들만의 고유한 사역은 아닌 것이다.
제사장 역할의 필요
우리가 구약의 제사장직의 본질을 살펴볼 때, 구약의 제사장들 역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는 목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간구 하는 일을 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직무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은 사람들을 향한 사역을 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쳤고, 사람들을 축복했으며, 상담자와 재판장 역할도 했다.
신약의 성직자들은 백성들을 위해 더 이상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를 드리지는 않는다.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가르치며 힘입게 하는 일을 할 뿐이다. 이 면에 있어서는 신약의 성직자들은 구약의 제사장들과 다르다.
그러나 구약 시대 제사장들의 목회적 사역은 신약 시대의 성직자들에게 맡겨진 임무와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가르치며, 영적 행복을 위해 돌보는 책임은 같은 임무로 주어졌다.
신약 성경이 신약의 성직자들만을 가리켜 제사장들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목회자들이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신약 시대에도 목회자들을 제사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르치며, 기도하고, 돌보는 목회적 책임이 어느 정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각 교회마다 목회자들을 두셔서 하나님의 양떼를 인도하며 먹이고 돌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만인 제사장직'의 개념을 내세워 성직자들의 특별한 임무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성직은 교회를 위해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기능을 경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를 멸시하는 것이 된다.
많은 목사들은 그들이 평신도들과 다른 특별한 사역에로 부름을 받은 특권층으로 생각한다. 성례를 집전하는 것과 축도를 할 수 있는 특권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구분은 성경적이라고 하기보다는 사람들, 특히 성직자들이 스스로 만든 구분인 것이다.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간의 구분을 더 이상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과 백성들간의 구분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성직자들이나 평신도들은 다같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제사장이며 선지자인 것이다.
목회자들은 더 이상 교회 안에서 특권층이 아님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교인들과 동일한 제사장이며 선지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교인들을 존중히 여겨야 한다. 스스로 교인들과 구별하려 하지말고 동일시하며 목회자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교인들에게 특별히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는 것처럼 행세해서는 안 된다. 거짓 선지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직자는 목자이다
'목사' 라는 말은 목자(Pastor)를 의미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목사가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들을 치는 목자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목사는 아니다.
목사는 그 자신이 하나의 양으로써 양떼 가운데 있으면서 다른 양들을 이끌고 먹이며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목사는 오만하거나 고압적인 태도를 나타내서는 안 된다. 목자란 양떼들을 앞으로 계속 몰고 가기 위하여 뒤에서 채찍이나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양떼들 앞서가며 양들이 스스로 따라오게 하는 자이다.
동시에 그는 양떼와 너무 떨어져 앞서가지 않아야 하고, 양들 가운데 곁길로 가는 것과 너무 뒤쳐져 있는 양들이 없는가 주의해서 살펴야 한다. 양떼를 습격할 이리떼가 없는지도 주의해야 한다.
양떼에게 횡포를 부리는 목자, 양떼가 어디로 가든지 방관하는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한 목자, 양떼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목자, 양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이리 같은 목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에게 대해 오래 참고, 그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 가르치며 희생적으로 돌보는 부모의 심정으로 목양을 해야 한다. 양들을 진정 아끼는 목자의 심정, 자녀를 진정 아끼는 부모의 심정을 갖고 목회를 해야 한다.
에디 깁스는 그의 책 「나는 교회성장을 믿는다」에서 지도력을 논의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예화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한 낡은 교회의 지저분한 마루 위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어떤 칠레 오순절교회 목사를 기억한다. 그는 언행이나 의복에서 그의 회중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생애를 헌신하여 그들에게 봉사했다. 그곳 사람들과 똑같이 그의 손도 울퉁불퉁했으며, 얼굴은 풍상으로 거칠어져 있었다. 그는 그의 교인들의 이름을 각각 부르면서 기도했으며, 마치 자신의 친혈육인 것처럼 사랑과 관심을 쏟았다. 그들은 그에게 있어서 친자녀만큼이나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 때문에 갖게 된 기쁨과 슬픔들을 모두 하나님께 털어놓았다. 한참동안이나 그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목사와 회중 사이에 존재하는 이 깊은 유대감이 라틴 아메리카의 오순절교회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게 한 비밀스런 요소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회자들을 불러 그의 피로 사신 양떼를 맡겨 먹이며 치게 하셨다. 목회자가 돌보아야 할 양들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백성이다 이 양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주셨으며,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주셨다.
이토록 귀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면서 물질적인 이득이나 명성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양들을 사랑해야 한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셨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 이시며, '목자장' 이시며, '양의 큰 목자' 이시다.
선한 목자로의 부르심
우리 목회자들은 '선한 목자' 이신 주님 자신을 목회적 모델로 삼아야 한다. 내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임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교인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되고, 교인들을 더욱 애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본을 따라 목양을 하기 위해서는 선한 목자의 특징을 알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10장 11-16절까지에는 선한 목자의 특징이 언급되어 있다.
선한 목자는 그의 양을 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가지셨다. 목사는 그가 목회 하는 교회 교인들을 개인적으로 알아야 한다.
교적부에 올려있는 하나의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그의 사람됨을 알고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
교인들의 이름을 적어 그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한다면 교인들의 이름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과 이름을 보면서 매일 기도하고, 만나서 인사하고 상담하고 함께 기도함으로 잘 아는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요즘 큰 교회 목사들은 목자형 목회가 불가능하니까 목장 경영주 스타일의 목회를 선호한다. 많은 목자들을 고용하는 목장 경영자로서의 목회를 한다는 것이다. 목회 업무를 분담한다는 면에서 가능한 일이지만, 양들과 밀착된 목회를 하지 못한다면 목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목회자는 그가 맡은 양들을 알아야 그들을 잘 인도할 수 있으며, 먹이며, 치료하고, 잘 돌볼 수 있을 것이다. 선한 목자는 그의 양을 섬긴다. '종의 지도력(Servant Leadership)' 이란 말이 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자기 목숨을 양들을 위해 대속물로 내어주셨다. 목자는 양들을 먹이는 자이지,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만 먹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리석은 양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며, 약하고 병든 양들을 돌보는 일은 힘들고 지저분한 일이다. 요즘말로 3D (힘들고, 더러우며, 위험한 일)의 일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든 것 다 기울여 돌보시는 양들을 우리가 어찌 전심전력하여 돌보지 않으랴!
리차드 백스터는 주님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죽었는데 너는 그들을 돌보지 않겠느냐? 그들은 나의 피를 흘릴만한 가치가있는 자들인데 너는 네 수고를 그들을 위해 기울일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이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그처럼 많은 고난을 당하고 너를 기꺼이 나의 동역자로 삼으려하는데, 너는 네가 책임져야 할 그 작은 것을 거부하겠느냐?"
선한 목자는 그의 양들을 인도한다. 오늘날 목회는 이전 어느 시대 목회보다 점점 더 힘든 과업이 되고 있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의식구조가 급속히 변화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목회자들의 리더십이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데서 어려움은 증폭되고 있다. 양떼가 안심하고 목자를 따라야 하듯 교인들이 안심하고 목회자를 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회자의 엄숙한 책임이다. 교인들이 목회자의 인도에 대해 "저건 아닌데"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일관성 있고 믿을만한 모범을 보여야 한다. 섬기는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먹여야 한다.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의 싱싱한 꼴로 양들을 먹여야 한다. 목사는 일차적으로 교사이다. 교회의 강단에서 신실하고 조직적으로 성경을 강해함으로 양들을 다양하고 순수한 양식으로 먹여야 한다. 좋은 꼴로 먹여야지 독이 있거나 썩은 꼴로
먹여서는 안 된다.
목자는 양을 먹일 뿐만 아니라 목자의 권위를 가지고 그의 양을 다스려야 한다. 주님께서도 "내 양을 치라"고 하셨다. 목사는 겸손히 섬겨야 함과 동시에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교인들로 하여금 목회자의 옳은 지도에 순종하고 복종하도록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한다. 공동의회, 제직회, 당회의 결의에 복종하도록 해야한다.
목자는 양을 지킨다. 어리석은 양들은 위험한 길과 잡아 삼키려는 이리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다. 목자는 양을 사랑함으로 이리가 올 때 양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는다.
6·25 전쟁 때, 손양원 목사님은 그가 돌보던 여수 애양원 성도들을 버려 두고 피난 갈 수 없어서 그들과 함께 머물다가 순교하였다.
오늘날 여러 가지 이단들의 유혹과 불건전한 신비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 등 성도들을 악화시키며 삼키려는 세력들이 많이 있다.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해야 한다. 바른 교훈으로 먹이고 이리를 내쫓는 일을 잘 감당해야 한다.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찾는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교회 목회자나 핵심 멤버들로 인해 시험받고 낙심하여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고 듣는다. 이들을 다시 우리 가운데로 인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택하신 양들로서 목자의 음성을 기다리면서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자들도 많이 있다. 이들을 찾아 구원하는 전도적 목회, 선교적 목회를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잃은 양들이나 찾은 양들에게 목자는 반드시 필요하다.
찾은 바 되어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을 잘 먹이고 잃은 양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있는 양들과 연합하게 하고 그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을 해야 한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보여 주신 모본을 따라 겸손과 섬김과 이해와 사랑과 인내와 온유함으로 목양 하는 자들은 참으로 존귀하고 행복한 자들이다.
송용조/ 풀러 신학교와 컨콜디아 신학교에서 조직신학(박사과정)을 공부했다. 미국에서 이민교회를 담임했으며 지금은 양의문교회를 담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