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성화론(펀글)
성경진리토론방
, 2003-02-21 , 조회수 (365) , 추천 (0) , 스크랩 (0)
2. 한국교회 성화론의 세가지 유형


2.1 수양적 성화론(Disciplinary Sanctification)


수양적 성화론은 웨슬리파 감리교회에서 강조적으로 가르쳐 왔다. 본래 John Wesley는 교리적이고 의식적인 영국교회를 개혁하고저 거룩한 생활의 실천을 외치며 감리교회를 창설하였는데, 그의 성령론에 대한 강조로 인하여 일부에서는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났고 후에 오순절교회로 분리되었으나, 전반적으로 감리교회는 예정과 은총을 강조하는 칼빈파와 달리 자유의지와 성화의 노력을 강조적으로 가르쳤다. 그런데, 한국에서 칼빈파 장로교회가 그 독특한 개혁주의적 성화론을 확립하지 못하면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완전주의만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웨슬리적 견해를 추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온 최초의 선교사들이 영국 웨슬리파 경건주의의 지도력아래 발생한 제2차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고 한국에 왔다는 역사적 배경을 돌이켜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127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 "감리교의 사고방식을 가진 선교사들"이라고 서술되었다.128 더우기, 그들은 특징적으로 청교도적 율법주의에 철저한 설교자들이었다.129

한편, 16세기 중국에서 일어난 첫번째 동양종교문화와 기독교의 만남에서 예수파 선교사들은 "존유배불(尊儒排佛)"을 선교정책의 표준으로 삼았으므로, 유교와 기독교의 유사점을 찾아 강조하는데 애썼다.130 그 결과 자연신학이 지배하게 되었고, 반면에 은총, 계시, 신앙, 그리고 특히 기독론과 같은 기독교의 독특한 가르침들은 자연히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131 따라서, 유교와 카톨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수양적 성화의 사상이 기독교 성화의 표준적 이해가 되었으며, 그 결과 은혜의 요소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최초의 감리교 목사이며 신학자였던 최병헌(1858-1927)은 "유교적 수양정신에 몸이 젖어" 있었기 때문에 "웨슬리의 신학적 특징인 완전한 성결을 향해 성장하는 점진적 성화의 사상"이 "보다 기독교의 신앙 이해를 쉽게" 해 주었던 것이며,132 그러한 성화 이해는 유교와 기독교를 적당히 배합한 7단계의 성화론을 가르치게 만들었다.133 또한, 최초의 세례받은 장로교인은 "노 도사"라고 전하며, 최초의 장로교 목사중 하나이며 초기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길선주는 본래 "길 도사"라고 불리웠는데, 이는 둘 다 개종하기 전에 도교의 수련에 정진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134

한국 장로교회의 가장 영향력있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박형룡(1897-1978)이 그의 성화론에 이 상황화를 반영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다. 비록 그의 기념비적인 7권의 [교의신학]이 주로 Louis Berkhof를 중심으로 Charles Hodge등의 여러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종합이지만, 그의 성화론은 두 면에서 이 외국신학의 한계를 넘어선다.135 첫째로, 그는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비록 성화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명시하고 있지만, 그는 "의식적 협력"이라는 새로운 항목을 독자적으로 첨가함으로서 인간의 협력을 강조한 것이다.136 둘째로, 그는 "기도와 묵상"을 성화의 방편으로 강하게 제시하였다.137 Berkhof는 성화의 방편으로 하나님의 말씀, 성례 및 섭리적 인도를,138 그리고 Hodge는 신앙,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의 내적 사역, 순종, 교회와 성례등을 나열하였으나,139 박형룡은 하나님의 말씀, 성례, 기도와 묵상, 섭리적 인도, 그리고 방편의 집요한 사용을 들었다.140 이 방편의 추가는 한국교회의 실행을 반영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방편의 고집적 사용"이라는 추가적 항목은 강조적으로 그 수양적 성격을 보강한다.141 그가 선택에서뿐 아니라 성화에서도 신인협동론을 명백히 거부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의 가르침은 성화의 실현을 위해 신과 인간이 각기 동격적으로 협력한다는 신인협동론(synergism)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142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혼동되었으며, 특별히 수양적 성화론이 전통적으로 지배적인 한국의 상황에서 그러하였다. 성삼위 하나님을 성화자(Sanctifier) 또는 성화의 주체(Subject)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인간의 협력없는 하나님의 주도적 성화는 부인되었다. 마치 성령은 항상 성화를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도울 준비와 열의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성화의 성취는 결정적으로 인간편에 달려 있다고 믿게 되었다. 따라서, 성화의 공로는 그를 성취한 개인에게 돌려져 교만을 조장하였다. 더우기, 도교나 불교나 유교와 같은 전통종교들도 이러한 인간의 자기수양론을 따랐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가 추구하는 덕목도 전통적인 덕목과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43 이 면에서, 예수님은 정도만 다를 뿐, 아브라함, 모세, 다윗, 또는 바울이나 혹은 심지어 비기독교적 성인들과 유사한 도덕적 모범으로 인식되었다.144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자기수양은 예수님 없이도 가능하였다. 왜냐하면, 그 목표와 추구할 덕목들은 이미 자연신학의 전통을 통해 알려진 사랑, 자비, 선, 의, 신실성, 성결, 겸손, 인내등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의 틀속에서 한국적 전통에 친숙하지 않은 자유나 기쁨과 같은 기독교적 덕목은 한국교회에서 상대적으로 미약하게 강조되었다. 이 수양의 노력을 통한 성화사상은 은총(sola gratia)의 구원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145 하나님편에 관한 한,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이미 믿고 있었다. 성화는 예수님없이 어려웠으나,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도 어려웠다. 왜냐하면 두 경우 다 그것을 실현해야 되는 주체는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한 전통적인 영적 소수정예주의(elitism)가 성화는 오로지 많은 시간을 힘든 평생의 수양에 헌신된 목사나 장로, 권사와 같은 소수의 신령한 사람들만이 성취할 수 있다는 "평교인"들의 비헌신적인 자세를 정당화해 주는데 기여하였다.

그뿐 아니라, 길고 긴 종교사를 통하여 잘 개발된 수양의 전통적 방법들--독경과 경전연구, 기도와 명상, 고행과 훈련, 적선과 시주등--이 그리스도인들의 방식에도 지배적인 영향을 미쳐, 한국교회에서 성경 읽기와 성경공부, 기도와 금식, 선행과 헌금등이 가장 유행하는 성화의 방법이 되었다.146 성경에 대한 사랑은 한국 기독교의 자랑이다. 사경회는 특징적인 전통이 되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성경을 많이 읽으려고 애쓴다.147 심지어 한 선교지도자는 이렇게 감탄하였다: "나는 전 세계에 과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보다 성경을 더 잘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생각한다!"148 또한, 강렬한 기도는 한국교회의 전통에 속한다. 거짓 신령들에게 드리던 전통적 기도를 떠나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혼자 집이나 산에서 기도할뿐 아니라, 교회에 모여 수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매일 새벽 기도한다. 금식기도, 철야기도, 그리고 40일기도와 같은 작정기도는 한국교회에 보편적이다. 물론, 성경공부나 기도와 같은 한국교회의 전통은 찬사를 보낼 만 하며, 성경과 교회 전통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들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영적 투쟁, 하나님과 원수를 포함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같이 중요한 요소들을 희생해 가며 강조된 한국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것이 적지 않게 경전과 기도를 통한 성화라는 전통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결론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2.2 운명적 성화론(Fatalistic Sanctification)


이 견해는 교조적인 장로교 예정론자들에 의하여 반의식적으로 개발되었다. 칼빈주의 예정론이 한국교회의 과반수를 점하고 있는 장로교회에서 강조적으로 가르쳐 졌는데, 신정론에서 섭리론과 예정론의 분명한 구별이 흔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릇된 운명론적 사상이 보편화되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은 하나님이 선택뿐 아니라 모든 것을 예정했다고 생각한다. 이 논리는 불교의 "업보(業報, 카르마)" 운명론과 무교의 "팔자(八字)" 운명론에 익숙한 한국전통에 매우 자연스러운 운명론적 태도를 개발하였다.149 이제 모든 것이--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성공이든 실패이든, 진보이든 퇴보이든--"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렸으며, 우리의 자유의지나 책임은 사실상 형식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화도 하나님의 뜻안에 있으며, 우리가 하는 것은 모두 죄악적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는 성화에 아무런 차이도 이루지 못한다. 우리를 선택하고 칭의하신 하나님은 적당한 때에 그의 방법으로 우리를 성화하고 영화하실 것이다. 이것은 매우 칼빈주의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삶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과거의 많은 수양적 성화에의 시도가 실패와 좌절로 끝났다는 경험으로부터 일어난 운명론적 태도와 패배주의가 지배적이다. 또한 거기에는 일종의 경건한 기만과 위선이 있다. 그것은 그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며 우리를 모든 행위에 있어서 자유롭고 책임있는 존재로 만든 성령보다는 인간적인 전통종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죄의 교리는 한국인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원죄 또한 그러했다. 불교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심지어 우리의 출생상태도 전생의 죄에 대한 응보이므로, 이 영원한 윤회의 삶에서 해탈하거나 혹은 극락에 왕생하기를 소원하였다. 이 운명적 순환의 시작은 알 수 없고 왜 모든 생명이 이와 같이 고통스러운 순환에 처하게 되었는지는 신비이지만, 이를 불평없이 운명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므로 원죄도 하나의 운명과 같이 받아 들여졌고, 따라서 한국교회에서 원죄의 교리는 결코 심각하게 의문이 제기되거나 저항되지 않았다. 한편, 이 전통적인 영향은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성화교리에 대해서도 역시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운명처럼 받아들였는데, 이는 매우 위험하게도 그들이 이미 그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성화는 구원과 구별되었고, 구원은 단순히 은혜로(sola gratia) 주어지는 칭의와 천국허입으로 생각되었다. 성화는 구원 여하 그 자체에는 아무런 실제적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단지 상급에 관계될 뿐이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자면, 심지어 아무런 성화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2.3 신비적 성화론(Mystical Sanctification)


신비적 성화론은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서 최근에 개발된 견해인데, 그들은 진정한 성화가 오로지 2차적인 의미의 성령세례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것은 또한 Wesley성화론의 오순절적 해석을 시도하는 성결교회의 견해와도 유사하다. 성결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조종남에 의하면,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John Wesley는, 중생시의 원초적 성화(initial sanctification)가 의도의 순수성(purity of intention)이라는 의미의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즉각적 성결경험의 두번째 축복을 통하여 실현되는 완전적 성화(entire sanctification)로 진보하며, 나아가 그것이 영화에 의해 완성된다는 점에서, 성화가 점진적이라고 가르쳤다.150 구원은 믿음을 통해 값없이 주어지지만, 성화는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모든 죄악적 요소를 태워버리는 제2은총의 "불세례"에 의해서 실현된다.151 만일 우리가 협력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리 마음문을 열고 신비한 불세례를 받기 위해 열렬히 기도하고 갈급해 하는 것이다. 비록 조종남은 장로교 구원론이 사실상 칭의에서 끝나버리나 성화는 여기에서 지금 자기와 자기 사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완전한 은총의 실현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했지만,152 그의 이해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실제에 있어서 제2의 은총이라는 순간적 경험을 위해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소위 불세례를 받지 않고는 전혀 진정한 성화가 불가능한데, 불세례는 우리의 의지나 노력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능력이 없다는 불순종적 그리스도인들의 변명을 정당화해 준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순종할 능력이 있다고 전제한다.

한국적 상황에서, 그것은 윤리적 성화와 마술적 성화가 본질상 서로 무관하다는 무교적 동기의 부흥이다. 1930년대의 부흥운동은 접신, 축귀를 통한 신유, 신비적 안찰등과 같은 일종의 무교적 신비체험을 교회에 도입하였다.153 그것은 강력한 대중 무교의 전통때문에 한국교회에서 관용되었으며, 1960년대 한국 오순절운동의 발생이후에 더욱 더 유행하게 되었다. 이 신비주의 운동은 성화를 단순히 순간적 황홀경(ecstasy)의 신비적 체험과 일치시키며, 그와 같은 신비체험 없는 모든 성화를 실제적으로 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이와 같이 보다 용이한 신비적 방법은 장구한 무교적 전통을 가진 한국인에게 보다 더 자연스러웠다. 나아가, 그것은 무교의 사제중심적 혹은 의식중심적 성화를 모방하였고, 그 결과 오순절적 그리스도인들은 신유와 축복의 신비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하나님의 종"의 마술적 접촉과 의식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


3. 결어


그러므로 나는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성화 이해에 있어서 심각하게 혼돈되어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거대한 세속화(世俗化, secularization)의 물결에 대항해서 자신을 지킬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못하며, 따라서 이미 심각하게 세속화 되어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소명받았으나, 한국의 현실은 보다 비관적이다. 무엇보다도 이미 기독교의 성화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그릇된 가정이 보다 더 유감스럽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의 성화와 전통종교들이 가르치는 성화를 혼동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한국교회는 기독교 성화에 대한 올바른 신앙과 진정한 능력이 부족하며, 그 결과 성화에 관한 한 좌절하거나 포기하거나 신비화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교회는 진정한 성화이해를 위해 모든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겸손히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성화(Christian sanctification)는 인간의 종교적 성화(humanistic, religious sanctification)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먼저 세속화한 성화론이 성화되지 않고는 진정한 성화의 체현이 불가능하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 구속사역은 우리의 주관적 수용 여부와 관계없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성화의 본질과 목적을 올바로 이해할 때 우리의 삶과 이 땅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올바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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