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와 개혁주의 논쟁
성경진리토론방
, 2003-02-21 , 조회수 (334)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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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418 송동민님의 개혁주의글들을 읽으면서

name : 류0훈    hits: 115    / date : 2002.08.04 21:45:00

동민님의 글들을 읽으면서 약간의 의문이 들어 글을 올립니다.
과연 동민님이 보시는 개혁주의 신학의 범주는 어디까지 입니까?

토론에도 논의되었지만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과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울러 그 배경에 깔린 신학에도 차이가  있구요.아울러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권 내에서 논의되어지는 학자님들의  개혁주의에 대한 의견도 다 차이가 있다고 볼수 있지 않나요.

예를 들면 이승구 교수님이나 서철원교수님등은 근본주의에 가까운 개혁주의 신학의 견해를 추구하고 있다고 보이고
이에 반해 숭실대의 김영한 교수등과 같은 분들은
복음주의 권의 개혁주의 성향을 띠고 있다고 보는데
그래서 사실 보수주의 권에는 분명한 개혁주의의 정의가 모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복음주의라는 말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자라온 배경이 개혁주의를 부르짖고 있는 터라
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한 고민으로 다가 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요.
양0송 선배님도 견해를 좀 피력해 주시지요.



류0훈 님에게
name : 송0민    hits: 50    / date : 2002.09.16 12:28:00

나는 근본주의적인 개혁주의자입니다. 저는 이승구 선생님에게 배우면서 개혁주의적인 성향을 따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승구 선생님이 근본주의적인 개혁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온전한 의미에서 "개혁주의적"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근본주의적인 교회에서 자라 왔고, 근본주의의 폐단들을 인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주의의 교리적인 방향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성경의 무오성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육체적 부활 등 핵심적인 교리들(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들)은 과학 문명이 발달한 21세기에도 그대로 하나님의 진리로 믿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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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121 한국 개혁주의를 재평가하기 위해서는...
name : 양0송    hits: 96    / date : 2002.02.16 08:06:00


송0민 님의 글에 대한 답변 성격을 띄면서 논의를 좀 확장해보면...


1. 박형룡 박사에 대한 평가

어느 정도 이뤄지지 않았나요? 총신의 박용규 교수도 박형룡 박사를 근본주의적 신학이라고 표현했던데(물론 그는 다시 '근본주의가 어때서'라는 식의 논지를 펴긴하지만), 그 평가는 어느 정도 합의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대립구도는 (그것이 미국이건, 유럽이건, 한국이건 간에) 자유주의-개혁주의가 아닙니다. 자유주의-근본주의라고 해야 맞지요.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 상당수는 개혁주의 신학을 하던 사람들이니까요. 또, 근본주의자들이 다 개혁주의자는 아니었으니까요. 개혁주의의 역사적 실체를 좀더 명확히 규정하셔야 하겠습니다.


2. 개혁주의 사상이 옳은가?

- 개혁주의 사상이 옳은가를 검증하는 방식에는 우선 그 내적 일관성(coherence)을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하는 말이 다른 부분에서 하는 말과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면, 그건 매우 즉흥적이거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논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다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엇이 대답 가능하고, 무엇이 가능하지 않은가를 말해 줄 수 있으면 됩니다.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 말이지요.


더불어 검증되어야할 것은 포괄성(comprehensiveness)입니다. 충분히 삶의 여러 국면을 담아낼 수 있을만큼 넓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합리성을 담으면서도 체험적 국면을 소화해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인간 고통의 문제를 충분히 넓게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한가지 더 덧붙이라면, 저는 몰트만이 언급한 얼마나 치유적(Therapeutic)인가하는 문제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싶군요. 사상이 얼마나 삶에 총체적으로 구현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특히 개혁주의의 요람이라고 할 화란의 식민지였던 남아공이 가장 극심한 형태의 인종차별(Apartheid)의 표본이 되었나는 류의 질문들 앞에 드러나는 문제일 것입니다. 칼빈의 제네바는 충분히 인간적으로 살만한 곳이었냐는 질문도 나올 수 있겠지요.

- 내적 일관성의 문제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그 전제(Presupposition)에 대한 검토입니다. 일관성 있는(혹은 추구하는) 논리적 체계를 쌓아올리기 위해 깔아둔 전제들이 무엇인가, 그 전제들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검증입니다. 그 철학적 전제, 실천적 함의, 문화적 경계 등을 분명히 검토해야 합니다. 한국의 개혁주의자들은 자주 이 부분을 건너뛰거나, 바로 성경에 호소하는데 이건 참으로 기이한 현상입니다.

우리가 초대교회 교부들을 연구하면 그들이 어느 정도 그리스 철학, 라틴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용어나 개념을 사용했는지를 비교연구하는 것이 당연하고, 어거스틴, 아퀴나스 등이 당대의 사상과 어떻게 교섭했는지를 밝혀내는데, 유독히 칼빈만 이런 사상사적, 문화적, 역사적 공간에 위치지움 없이 바로 성경으로 그 근거를 소급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최소한 학문적으로 공정하지 않고(unfair), 옳지도 않다고 봅니다.(사실 외국에선 이걸 다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끼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의 영향이나, 정치적, 문화적 배경들에 대한 연구에 완전히 눈을 감기 전에는 이런 주장은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더구나, 언급하신 비교적 최근의 여러 개혁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이런 작업이 가해져야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텐데 이들의 입장을 바로 '가장 성경적'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들이 일세기 유대로부터 바로 온 것이 아닌 다음에는 가당치 않은 입장입니다.


3. 한국의 개혁주의는 서구 개혁주의와 격차가 큰가?

- 당연히 격차가 큽니다. 앞서 말했듯이 서구 개혁주의는 많은 경우 자유주의적입니다. 그러니, 개혁주의가 당연히 보수주의가 될 수도 없고, 그 내부의 신학적 지형도를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셔야 할 겁니다. 당장, 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 (warc.ch)나 Reformed Ecumenical Council(www.gospelcom/rec) 같은 곳을 방문하셔서 그 신학적 정향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저로서는 복음주의란 카테고리가 님이 생각하는 신학적 구도를 좀더 유연하게 설명해 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만, 그건 님의 판단에 달린 문제이겠지요.




개혁주의와 자유주의

name : 송0민    hits: 69    / date : 2002.02.16 11:27:00

제가 먼저 쓴 글을 지워서 죄송합니다. 제가 쓴 글에는 양0송 님이 인용하셨듯이

1. 박형룡 박사가 한국 보수 신학계에 미친 영향에 대한 평가
2. 개혁주의 신학의 타당성 문제
3. 한국의 보수 신학과 전통적 개혁신학 사이의 차이점
4.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의 갈등에서 박형룡 박사의 역할과 그 정당성 문제

를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어제 제가 그 글을 지운 것은 아직 이렇게 중대한 문제들을 언급하기에는 저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희송 님께서 질문들을 주셔서, 저도 나름대로 답변해 보겠습니다.

(# 표시가 제 답변입니다.)



>송동민 님의 글에 대한 답변 성격을 띄면서 논의를 좀 확장해보면...

>1. 박형룡 박사에 대한 평가

>어느 정도 이뤄지지 않았나요? 총신의 박용규 교수도 박형룡 박사를 근본주의적 신학이라고 표현했던데(물론 그는 다시 '근본주의가 어때서'라는 식의 논지를 펴긴하지만), 그 평가는 어느 정도 합의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대립구도는 (그것이 미국이건, 유럽이건, 한국이건 간에) 자유주의-개혁주의가 아닙니다. 자유주의-근본주의라고 해야 맞지요.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 상당수는 개혁주의 신학을 하던 사람들이니까요. 또, 근본주의자들이 다 개혁주의자는 아니었으니까요. 개혁주의의 역사적 실체를 좀더 명확히 규정하셔야 하겠습니다.



# 우선, 박형룡 박사님이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저도 박용규 교수님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박형룡 박사님이 취했던 태도는 온당했다고 봅니다. (물론 교회가 분열한 것은 마음아픈 일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 개혁주의 신학자가 있었다는 말씀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으로 전향했다는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에밀 브루너와 칼 바르트처럼 개혁교회 내에 있었던 신학자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어딘가에서 얼핏 불트만도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에 포함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 말씀인가 합니다.

#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이 서로 유대할 수 없는 것은, 그 신론과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성경관 등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유주의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과 유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전제를 포기해야 하고, 개혁주의 신학 역시 그 정체성을 포기해야만 자유주의 신학과 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정체성의 포기는 양쪽 다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2. 개혁주의 사상이 옳은가?

>- 개혁주의 사상이 옳은가를 검증하는 방식에는 우선 그 내적 일관성(coherence)을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하는 말이 다른 부분에서 하는 말과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면, 그건 매우 즉흥적이거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논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다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엇이 대답 가능하고, 무엇이 가능하지 않은가를 말해 줄 수 있으면 됩니다.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 말이지요.


# 개혁주의 신학에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조직신학의 방면에서 보면, 일곱 가지입니다.

1. 서론: 신학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방법론의 문제)
2. 신론: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
3. 인간론: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4. 기독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5. 구원론: 사람에게는 왜 구원이 필요하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6. 교회론: 교회는 어떤 공동체인가?
7. 종말론: 이것은 기독교의 특유한 사상입니다. 세상의 역사에는 종말이 있는데, 그 종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더우기 20세기에 들어서 "이미...아직 아니"의 종말론적 구조가 연구됨으로써(복음서 연구)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은 이미 세상 속에 들어와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더욱 특징적입니다.

# 개혁주의에 분명한 내적 일관성은, 조직신학 내에서 이 7가지 분과가 철저하게 서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 7가지 분과는 서로 긴밀한 논리적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 "왜 그런가?" 다시 말해서, 어떻게 이러한 질문들에 답변할 수 있는가 하고 질문하신다면,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이 그 원천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즉,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가 위와 같은 질문들에 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보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알 수도 파악할 수도 없는 엄청난 문제들이지만 성경에 의거해서 생각해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더불어 검증되어야할 것은 포괄성(comprehensiveness)입니다. 충분히 삶의 여러 국면을 담아낼 수 있을만큼 넓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합리성을 담으면서도 체험적 국면을 소화해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인간 고통의 문제를 충분히 넓게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 포괄성 문제라면, 삶을 관찰하고 경험하며 이해하는 일은 개혁주의 신학 내에도 있습니다. 즉,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사람들의 실제적인 고통에는 눈과 귀를 다 막고 성경만 들여다 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현실의 문제와 어려움들을 직시하면서도, 그 올바른 진단과 해결책이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믿는 것입니다.

# 인간의 종교의식이나 이성에서 그 해결책이 나오지 않기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성경을 통해서 그 진단과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그들의 고통과 문제들을 온전히 해결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가지 더 덧붙이라면, 저는 몰트만이 언급한 얼마나 치유적(Therapeutic)인가하는 문제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싶군요. 사상이 얼마나 삶에 총체적으로 구현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특히 개혁주의의 요람이라고 할 화란의 식민지였던 남아공이 가장 극심한 형태의 인종차별(Apartheid)의 표본이 되었나는 류의 질문들 앞에 드러나는 문제일 것입니다. 칼빈의 제네바는 충분히 인간적으로 살만한 곳이었냐는 질문도 나올 수 있겠지요.


# 몰트만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치유적(therapeutic)의 의미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에는 그 병의 증상과 원인, 진전 등을 정확하게 살펴야 하고, 처방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마, 사람들의 삶이 여러 가지 사회적/문화적 문제로 눌리고 상처를 입은 것을 치유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해석되는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든지 심각한 문제들이 있지만, 그 해결책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 우리가 언제나 보아 온 대로, 사람들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에는 그 갈등과 불신, 아픔의 깊이가 더 커집니다. 한국 사회만 보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비판하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정작 사회 구조의 병폐와 어두운 부분들은 더 깊어져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 더우기, 사람의 마음을(또는 사회를) 치유하려고 할 때에는 그 원인과 대책을 잘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이 사람의 원래 모습과 현재 상태에 대해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역할, 즉 투명한 거울(mirror)의 역할 또는 청진기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올바르게 인간을 볼 수 있어야만 그 치유책도 가능한 것입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이나, "의원아, 너부터 고치라" 하는 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입니다.



>- 내적 일관성의 문제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그 전제(Presupposition)에 대한 검토입니다. 일관성 있는(혹은 추구하는) 논리적 체계를 쌓아올리기 위해 깔아둔 전제들이 무엇인가, 그 전제들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검증입니다. 그 철학적 전제, 실천적 함의, 문화적 경계 등을 분명히 검토해야 합니다. 한국의 개혁주의자들은 자주 이 부분을 건너뛰거나, 바로 성경에 호소하는데 이건 참으로 기이한 현상입니다.


# 전제에 관해서라면, 코넬리우스 반 틸이 이미 정립해 놓은 전제주의 변증학을 말씀드려야 겠습니다. 철학적 전제와 실천적 함의, 문화적 경계 등을 이야기할 때에 개혁주의 신학은 결국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로 집약됩니다. 세상이 존재할 수 있게 된 전제도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의 전제 역시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선과 악, 아름다움 등의 윤리적/미학적 가치도 하나님께 연관될 때에만 비로소 의미를 찾게 된다고 봅니다.

# 문화적 경계라면, 우리는 이미 윤리적/미학적 가치를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올바른 문화라고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가 안다는 것을 전제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 실천적 함의 역시,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교훈적 의지, 즉 우리가 어떠어떠하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을 찾기에 힘쓰고, 또 그 찾은 뜻대로 실천하기에 힘쓰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신앙 고백 대로 충실하게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늘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발견 때문에 더욱 노력하게 된다고 봅니다. (이는 어거스틴의 말인데,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느낌으로써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초대교회 교부들을 연구하면 그들이 어느 정도 그리스 철학, 라틴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용어나 개념을 사용했는지를 비교연구하는 것이 당연하고, 어거스틴, 아퀴나스 등이 당대의 사상과 어떻게 교섭했는지를 밝혀내는데, 유독히 칼빈만 이런 사상사적, 문화적, 역사적 공간에 위치지움 없이 바로 성경으로 그 근거를 소급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최소한 학문적으로 공정하지 않고(unfair), 옳지도 않다고 봅니다.(사실 외국에선 이걸 다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끼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의 영향이나, 정치적, 문화적 배경들에 대한 연구에 완전히 눈을 감기 전에는 이런 주장은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더구나, 언급하신 비교적 최근의 여러 개혁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이런 작업이 가해져야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텐데 이들의 입장을 바로 '가장 성경적'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들이 일세기 유대로부터 바로 온 것이 아닌 다음에는 가당치 않은 입장입니다.


# 그러니까 칼빈이 어떠한 철학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그 전제 위에서 신학을 전개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으로 생각됩니다. 그 질문은 옳은 것인데, 왜냐하면 그 누구도 "진공 상태"에서 그의 신학을 전개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솔직이 칼빈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서 제가 자세하게 연구해 본 바는 없습니다만, 칼빈이 "성령님께 충실하게 의존하려고 애쓰면서" 신학을 진전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그의 사상적 배경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칼빈의 사상에서는 "성령님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 B.B.워필드는 그의 책 <Calvin and Augustine>에서, "어거스틴은 은혜의 신학자, 안셀름은 대속의 신학자, 루터는 칭의의 신학자라면,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Abraham Kuyper 역시 그의 책 <성령의 사역> 서문에서, 칼빈이 교회에 준 가장 큰 기여는 성령 하나님에 관한 교리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칼빈의 사상 구조에서 "성령님의 역할"은 매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한국의 개혁주의는 서구 개혁주의와 격차가 큰가?

>- 당연히 격차가 큽니다. 앞서 말했듯이 서구 개혁주의는 많은 경우 자유주의적입니다. 그러니, 개혁주의가 당연히 보수주의가 될 수도 없고, 그 내부의 신학적 지형도를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셔야 할 겁니다. 당장, 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 (warc.ch)나 Reformed Ecumenical Council(www.gospelcom/rec) 같은 곳을 방문하셔서 그 신학적 정향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개혁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은 그 방법론과 전제, 그리고 사상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한 편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해 버리지 않는 한 유대 관계를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은 현실에 동화되는 것이 그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에 충실하게 생각해 가는 것이 목표인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로서는 복음주의란 카테고리가 님이 생각하는 신학적 구도를 좀더 유연하게 설명해 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만, 그건 님의 판단에 달린 문제이겠지요.


# 저는 가능한 한 "복음주의적 개혁주의" 입장에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순전한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에 더 가까이 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개혁주의 논쟁   
약간의 반론
name : 양0송    hits: 66    / date : 2002.02.16 19:41:00


1. 자유주의-개혁주의 대립?

송0민님이 주장하신 개혁주의는 역사적으로 정확치 않습니다. 님이 언급한 20세기 인물말고, 그 전의 신학자들을 계승하는 개혁주의의 범주는 매우 넓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이들 전부를 통틀어 개혁주의적 신학의 유산 아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묘사일 것입니다. 님이 생각하는 개혁주의는 그러므로 현실 개혁주의의 우산 아래에 있는 세부 단위일 것입니다. 제가 복음주의란 카테고리를 제안한 것은 개혁주의 바깥에 님이 생각하는 신앙적 전제를 갖고 있던 또다른 집단들이 많이 있었으니, 그들도 한 범주로 묶는 것이 옳다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복음주의는 혹은 20세기초반의 보수주의는 개혁주의보다는 넓은 개념이 되고, 신학적으로는 매우 다양한 흐름을 포괄하는 것이 됩니다.

몇가지 반증을 들어보지요. 님이 언급하신 로이드 존스는 엄밀히 말하면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그는 교회론적으로는 회중교회 전통이고, 성령론은 오순절 쪽으로 많이 기울었습니다.(당시 존 스토트와는 대조적이었지요) 그의 성령론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관점에서 도날드 맥클레오드가 비판한 책이 한국에 나와 있을겁니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은 단적으로 워필드 등이 주장하는 은사중지론과 대척점에 서 있지요.(은사중지론은 사실 성경의 권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주장인데, 현재 성령론에 가장 권위있는 학자중 한사람인 LBC의 막스터너의 책에서 은사 중지론이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다는 비판을 잘 하고 있습니다.)

바르트는 자신이 칼빈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영향을 공공연히 말합니다. 그를 넓은 의미에서 개혁주의 라인에 넣는 것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습니다. 개혁주의의 신학적 기원을 칼빈에다 놓는다면 말이지요. 유럽대륙에서 개신교 신학자는 루터란 아니면, 칼비니즘입니다. 개혁주의라고 그냥 말하지 않고, 화란 개혁주의란 명칭을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개혁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거든요. 그러니, 개혁주의-자유주의란 대립구도는 제가 생각할때 제대로 맥락을 아는 사람이라면 동의가 되지 않는 구도입니다. 특히, 바르트나 본회퍼가 자신들의 스승인 '위대한' 자유주의자 아돌프 하르낙 같은 이들을 비판하면서 신학적 방향을 바꾼 사실은 잘 아실 것입니다. 학자들이 만장일치로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하르낙에 반대하는 바르트나 본회퍼를 똑같이 자유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용어의 엄밀성에서도 문제가 있지요? 님이 사용하시는 용어가 역사적 실체를 지칭하는 것인지, 단순히 엄밀하지 않은 일종의 인상비평적 용어로 쓰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후자에 대해서는 그렇게 쓰는 사람들은 한국의 개혁주의자나 근본주의자들이 대부분이란 사실을 첨언해 둡니다.

혹은 레슬리 뉴비긴 같은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는 개혁교회의 비숍이었고, 오랜동안 WCC에서 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을 해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신학적 지향은 오히려 복음주의권에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변절한 개혁주의자인가요, 아니면 변장한 개혁주의자(복음주의자?)인가요? 저는 송동민님 같은 이는 그의 저작을 읽으면서 이런 정도의 분간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그에게 라벨을 붙여줘서 '읽어도 좋음', '요주의', '나쁜 넘'라고 해주지 않아도 그의 신학적 저작을 통해 스스로 그의 신학적 방법론과 지향, 그것이 나의 신학적 입장과 어떻게 만나고, 헤어지는지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의 개혁주의자들이 상정하는 것보다 신학의 경계는 훨씬 심하게 서로의 영역을 넘나듭니다. 무엇이 중심가치이고, 무엇은 부차적인가를 설정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늘 신학은 이런 질문을 중심에 품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의 신학이 영원불멸하게 진리를 포착해주면 얼마나 편하고 좋겠습니까?

님이 개혁주의 신학의 일관성과 포괄성으로 제시해준 7가지 신학의 영역은 성경 그 자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 체계를 창출한 사람이 최선을 다해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해낼려고 노력은 했겠지만, 그것이 그 자체는 아닌거지요. 칼빈이 7가지로 정리했나요? 나중에 누가 8가지나 9가지로 정리하면 안되는 겁니까? 혹은 그렇게 분리해서 정리하면 안된다, 하나의 이야기로 가야한다고 말하면 그건 잘못된 걸까요? 이 모든 것은 성경에서 설정한 범주 안에서 잘 정리해내면 되는 문제입니다. 문제는 과연 성경이 이런 교리를 직접 창출하느냐, 아니면 교리는 인간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유추해낸 것이냐는 질문이 나옵니다. 물론 님께서는 여기에 성령의 내적 조명과 가르침을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는 성경의 이야기에서 유추된 잠정적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본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면, 교리도 달라집니다. 단적인 예로 카톨릭이 행위구원을 말할때, 본문에 대한 해석을 달리함으로써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는 얘기를 개혁자들이 할 수있지 않았습니까?

개혁자들 이후 시대에는 더이상 새로운 해석은 없는겁니까? 성령은 사도시대가 아니라 개혁자들(특히 칼빈)이후로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까? 제 요점은 그래서 칼빈이 틀렸다가 아니라, 칼빈도 성경아래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한 성경의 영감에 대한 논쟁이나, 현대 성서학의 여러 발견들(성서학을 도외시하면서 어떻게 성경적이 될 수 있나요? 칼빈의 눈으로 성경을 보겠다면서, 어떻게 칼빈을 성경아래 조명할 수 있지요? 거기서는 보고싶은 것만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건 전형적인 순환논리 아닙니까?)은 우리 이해의 지평을 넓혀줍니다. 그 결과물을 무비판적으로 다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받을 건 받고, 물리칠 건 물리쳐야죠. 성서학 자체를 경원시하는 것은 일종의 지적 패배주의이고, 그러면서 성령이 우리에게는 바른 조명을 주어서 올바른 성경이해를 줄 것이다란 얘기는 일세기 쿰란 공동체이래로, 섹트들이 주장해왔던 전형적인 입장아닙니까?

다음에 또 더 얘기하지요.